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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은 숲 May 28. 2024

오르비에토에서 느리게 여행하기

50대 4남매, 아날로그적 방식의 자유여행

로마에서 6일을 머무는 동안 하루 정도는 근교의 소도시에 다녀오기로 했다. 로마 근교 여행지를 알아보니 오르비에토가 눈에 들어왔는데 기차로 1시간 20여 분 걸리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인 데다가 중세 시대가 잘 보존된 자연 친화적인 도시였다.


여행 블로그에서 나는 몇 가지 정보만 머릿속에 넣어두고-예를 들어, 예매 없이 당일날 기차표를 살 수 있는데 트랜이탈리아 매표소에서 구입할 것, 기차역에서 내려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갈 것, 이어서 버스를 타고 시내에 들어갈 것 - 발길 닿는 대로 거니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로마여행 5일째 되는 날 아침, 동생들과 테르미니역으로 향했다. 로마의 테르미니역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에서 들고 나는 기차들과 여행객들이 북적거리는 넓고 큰 기차역이다. 그곳에서 기차표를 끊고 기차를 타는 게 처음이어서 조금은 긴장되었다.


트랜이탈리아 로고가 보이는 매표기에서 발권을 하려고 시도해 보았는데 잘 되지 않아서 창구에 가 직원에게 기차표를 구입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기계보다는 사람이 익숙하고 편하다.

오르비에토 기차역

기차표를 구매했으니 다음에는 플랫폼을 찾아 기차 타는 미션이 남았다. 여행블로그를 읽어보면 오르비에토 가는 기차 플랫폼은 상당히 멀어서 여유 있게 가야 한다고 쓰여 있다. 테르미니역은 너무 넓어서 오르비에토행 플랫폼을 찾아가는데 5분도 훨씬 더 걸린 것 같다. 다행히 기차는 놓치지 않았고 무사히 오르비에토역에 도착했다.


오르비에토의 첫인상은 수수하고 소박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중세 시대 번성했음을 증명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두오모가 있다. 기차역 맞은편에서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니 마을버스 타는 곳이 나온다.

오르비에토 골목길과 돌길

버스는 오래된 골목길을 달리는데 버스가 다니기에는 길이 아주 좁았다. 더구나 아스팔트가 아니라 몇 백 년은 됐음직한 돌길이었다. 이들은 편안함을 위해 길을 넓히거나 오래된 집들을 부수고 새롭게 짓는 대신 전통을 지키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옛 것을 보존하고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바라본 광장은 고풍스러우면서 정겨운 소박함이 있다. 넓은 광장에 사람들은 드문드문 거리를 걷고 여행객도 많지 않아 거대도시 로마에 비해 한층 여유롭다. 골목으로 들어서니 각각의 가게마다 개성이 넘치고 디자인이 예술적이어서 가게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오르비에토의 레스토랑과 점심

구경하는 사이 배가 고파와서 점심 먹을 곳을 찾았다. 우리는 지나는 길에 눈에 띈 아기자기한 레스토랑 야외테이블에 앉아서 스테이크와 스페셜 메뉴를 주문해 나눠 먹었다.


이탈리아식 햄과 치즈, 절인 야채와 삶은 야채 등 모든 요리가 이탈리아식 전통과 오르비에토의 토속성을 담고 있어서 새로운 경험이었는데 건강한 맛이 깃들어 있는 데다가 맛도 좋았다.

오르비에토 두오모

배를 든든히 채우고 이제 본격적인 마을 산책에 나선 우리는 오르비에토의 두오모를 보러 갔다. 멀리서도 눈에 뜨이는 고딕 양식의 두오모 정면 파사드는 예술품이었다. 암벽으로 이루어진 언덕 위에 올라선 작은 마을에 이런 두오모가 있다는 건 중세 시대 오르비에토의 영광이 아닌가 싶었다.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품과 모자이크, 장미창으로 꾸며진 성당 앞에서 우리는 각자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찍으며 두오모를 저장했다. 그리고 두오모가 보이는 야외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지척에서 아름다운 두오모를 원 없이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자유여행이 주는 선물이었다.

카페를 나와 발길 닿는 대로 골목길을 거닐었다. 몇 백 년은 족히 되었을 오래된 집들의 벽과 대문, 창문과 발코니가 각각 다르면서 조화로웠다. 오래된 것들은 햇빛과 바람과 눈과 비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어 있어선 지 그들이 지나왔을 시간이 보인다. 사람의 인상에서 그의 살아온 삶이 보이듯이 집도 문도 돌담도 그랬다.


오르비에토의 자연 풍광

골목길을 걷다 보니 길은 끊어지고 앞이 훤히 트여 초록의 들판과 나무와 산들이 내려다 보인다.  그동안의 피로가 싸악 날아갈 것만 같은 풍경이다. 압도하지 않아서 좋고 익숙해서 편안하고 다양한 초록 빛깔이 주는 풍요로움에 눈이 시원해졌다.


오랜 세월 자연의 작용에 풍화된 건물들을 보면 그 속에 깃든 세월과 몇십 대에 걸쳐 살아간 사람들의 인생이 느껴져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 속에서 이 지역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가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온기로와 진다. 그런 마음은 자연이 주는 선물, 오르비에토가 주는 선물이었다.

오후의 해가 저물어가고 우리는 로마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했다. 오르비에토 기차역 플랫폼에 앉아 있는데 오후의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시원하고 새들은 지저귄다. 한가로운 전원 풍경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침부터 기차표 끊느라 헤매고 길을 잘못 들어 헤맸던 긴장감이 풀리면서 현지 사람들을 만나 물어보고 소통할 수 있었던 고맙게 느껴진다. 돌아오는 길에 온 마을을 구석구석 도는 마을버스를 타게 되어 로마에 못가게 될까 전전긍긍했지만 덕분에 오르비에토의 시골 마을과 집들을 가까이에서 구경할 수 있던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했으면 덜 헤맸겠지만 모르는 길이 나오면 현지인에게 물어보면서 다닌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준 것 같다. 덕분에 동생들과 즐거운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오르비에토 여행은 현대인이 잊고 살아가는 자연적인 방식 그리고 불편하지만 인간과 환경에 좋은 삶의 방식이 무언가 생각케 한다. 그리고 오르비에토는 일상을 자연친화적으로 느리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로 소중히 기억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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