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크레인의 시에나를 위한 노래
언젠가 라디오에서 브라이언 크레인의 'Song for Siena'를 들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도시 시에나를 여행하면서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피아노로 연주되는 음악은 귀를 즐겁게 해 주었고 가 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동경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밝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가족과 함께 고성길을 산책하거나 땅거미가 지는 어스름 녘, 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한 친구와 오래된 광장 주변을 걷거나 호젓한 산책길 벤치에 앉아 하늘과 나무와 새를 바라보며 느껴봄직한 평화롭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곡이었다.
브라이언 크레인이 만든 음악을 듣고 나는 시에나, 라 불리는 도시가 궁금해져서 찾아보았다. 시에나는 중세 시대에 세력을 형성해 발달했던 도시로 가까이에 있는 피렌체와 경쟁 관계였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피렌체와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시에나는 발전할 수 없었고 덕분에 중세의 분위기가 그대로 보존되어 지금은 구시가지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존 가치를 인정받는 도시였다.
브라이언 크레인의 피아노곡을 들으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시에나에 가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코로나가 퍼지기 바로 전 2019년 11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피렌체에서 일주일 머물고 베네치아에서 사흘 머무는 일정을 짰다. 이번에는 비행기표와 숙소 예약뿐만 아니라 피렌체에서 베네치아 가는 기차표도 예매하고 피렌체의 두오모와 우피치 미술관 티켓도 인터넷으로 예매했다.
유럽으로 가는 여행은 언제나 설레지만 언제나 해야 할 일이 많다. 항상 처음 해 보는 일이 생겨 나이가 점점 많아지는 나는 많아지는 나이만큼 점점 헤매는데 그것을 통해 배우는 게 있으니 그 또한 즐기면서 준비하자고 생각한다.
이번 여행은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셋이서 함께 떠났다. 피렌체에 숙소를 정해 놓고 브라이언 크레인의 피아노곡을 만나러 시에나에 다녀왔다. 피렌체에서 시에나까지 버스를 타고 갔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토스카나 지방의 아침은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옹기종기 나무가 있고 드문드문 인가가 보이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처음 본 시에나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흐렸고 11월의 아침 공기는 쌀쌀했다.
시에나의 골목은 꾸불꾸불했고 오래된 벽들을 지나 우리는 시에나의 중심지 캄포 광장에 도착했다. 부채꼴 모양의 캄포 광장은 유럽의 여느 광장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었고 지금은 시 청사로 쓰인다는 밝은 번트시에나 빛 푸블리코 궁전은 광장의 색과 분위기를 고풍스럽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시에나를 담은 엽서와 마그네틱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 흐렸던 하늘은 어느새 비를 뿌리고 있었고 광장의 카페에서 우리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캄포 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서 마시는 에스프레소는 시에나가 담고 있는 이탈리아의 풍미가 느껴졌고 따뜻한 커피는 늦가을 차가운 바람을 녹여주었다.
빛바랜 붉은 벽돌 길을 따라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나와 동생과 친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우산 속에서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오래된 집들을 눈에 담으며 걸었다. 피렌체의 복잡함 대신 조용해서 한가롭고 따사로운 불빛의 상점들을 구경하면서 걸었다.
조금씩 언덕을 오르니 시에나의 두오모가 보였다. 시에나의 두오모는 르네상스의 꽃이라 불리는 피렌체의 두오모에 견줄 만큼 멋지고 웅장했다. 고딕 양식의 성당 외부는 섬세한 조각과 청록빛 대리석의 줄무늬로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부도 마찬가지로 중후하면서 경건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특히 교황 피우스 2세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는 피콜로미니 도서관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했다. 프레스코화로 그린 교황 피우스 2세의 일대기와 천장을 장식한 문양과 그림들은 세밀하고 섬세했다. 전체적으로 경건함 속에 화려한 색감과 조화로운 구성미가 돋보였다.
시에나의 두오모는 중세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시에나의 권위와 부와 세력을 보여준다. 특히 청록색 대리석의 오묘한 빛깔이 나에게는 너무 인상적이었다. 성당 내부에도 외부에도 줄무늬로 쓰인 청록색 대리석은 전체적으로 성당을 장식하는 효과를 가질 뿐만 아니라 녹색의 나뭇잎이 돌에 내려앉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오묘한 청록빛이다. 그래서 시에나의 두오모는 자연이 선물한 청록빛 대리석을 머금은 아름다운 성당으로 기억된다.
기억 속의 시에나는 언제나 흐리다. 날이 흐려서 중세의 시간을 품고 있는 빛바램이 더 확장되어 깊이 있게 다가온다.
브라이언 크레인이 피아노 속에 담은 차분한 구슬픔은 수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비를 맞고 바람을 맞아 몸을 뒤채곤 했을 골목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패배의 기억을 되살려 놓은 게 아닌가 싶다. 패배의 흔적으로 성당의 벽은 미완으로 남아 중세의 시간을 살려내고 건반은 여리고 섬세하게 패배의 기억과 흔적으로 삶을 이어갔을 사람들을 위로하는 듯하다.
피아노의 서정성이 담겨있는 시에나의 애잔함은 붉은빛 벽돌담의 빛바램과 참혹한 전쟁의 시대에 많은 희생을 치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들린다.
생명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동토에서도 봄이 오면 싹이 나고 꽃이 피듯이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생명은 이어지고 삶은 되풀이되는 거라고 그래서 중세의 시간을 품고 있는 시에나는 검은건반 속에서 차분하게 애잔하고 흰건반 속에서 조용하게 평화로웠다.
브라이언 크레인의 피아노를 들으며 오래된 붉은빛과 오묘한 청록빛의 시에나를 동생과 친구와 함께 해서 행복했던 시간들을 되살린다. 2019년 늦가을, 추적추적 비 뿌리던 시에나의 흐린 하늘을, 따뜻했던 에스프레소를 기억한다.
겨울에서 봄으로 향하는 계절에 서서, 'Song for Siena'의 피아노가 평화로운 마음으로 건반 위를 산책하듯이 나 역시 세상이 언제나 어디서나 평화롭기를 그래서 평화로운 세상이 자연스럽게 오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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