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의 엄마 걱정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by 밝은 숲

가을이 번지고 있는 계절에 책장에서 기형도의 시집을 꺼냈다.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은 시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다. 책을 펼쳐 기형도의 시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 ‘엄마 걱정’을 찾아 먼저 읽는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해는 져서 어두운데 방은 차갑고 유리창은 금이 가 있다. 천지사방에 아무도 없는 적막감이 비에 실려 아이의 영혼을 짓누르는 것 같다. 기다리는 엄마는 밤이 늦도록 오지 않는다. 무거운 열무를 이고 시장에 간 엄마는 다 팔려야 밥을 먹을 수 있는 절박함 때문에 발걸음을 늦추고 있나 보다. 아이는 어둠이 무섭고 혼자 있는 빈방이 무섭고 기다림에 지쳐 세상이 두렵다. 그래서 시인에게 유년 시절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어둡고 무섭고 차가운 윗목으로 기억되고 있다.


기형도의 시 '엄마 걱정'은 우리가 지나 온 유년의 여리고 연약한 영혼이 입은 상처를 불러내어 같이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태어난 시인은 산문시 '위험한 가계 1969'에서 자신의 유년시절을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아버지는 풍으로 쓰러져 누워 있고 누이들은 학교 대신 돈 벌러 공장에 나간다. 호롱불 켠 방안은 검정 그을음으로 물들고 겨울밤에는 추위 때문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이 든다. 열 살인 시의 화자는 반장이고 월말고사 상장을 받을 만큼 공부를 잘한다. 하지만 종잇장 같은 배와 성냥개비 같은 팔을 지닐 만큼 혹독한 가난은 아이의 기쁨을 앗아가고 희망 대신 절망을 먼저 배우게 한다. 그래서 아이는 상장을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다.


유년시절의 가난과 참혹한 시대의 상처와 사랑의 상실로 인해 기형도의 시들은 검고 절망적이다. 시인에게 세계는 어둡고 쓸쓸하며 두려운 곳이다. 믿음은 헛되고 꿈들은 망가졌다. 기쁨은 참담하게 비어 있으며 희망 역시 어둡게 텅 비어 있다. 비어 있는 희망의 자리에서 시인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p53)' 탄식한다.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한 기형도는 1984년에 중앙일보 기자가 되었다. 그 이듬해 1985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리고 그는 1989년 3월 7일 삼십 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시인의 유고 시집이기도 한 <입 속의 검은 잎>에는 총 61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집 속 그의 세계는 불안하고 어두컴컴하다. 검은 유리창을 통해서 본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떠 있고 검고 무뚝뚝한 나무에는 검은 잎이 달려있다. 두려운 눈빛과 캄캄해진 눈으로 검은 입술을 하고 검은 얼굴로 시인은 세상을 보고 자신을 그렸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시인이 생을 마감한 1989년 봄에 발표된 시 '빈 집'은 마치 시인이 세상에 보내는 유언장 같다. 시인은 사랑만 잃은 게 아니라 삶을 잃은 것만 같다. 자신의 짧았던 생에 작별 인사를 하고 자신이 품었던 열망들에게 이별을 고한다. 사랑과 열망과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빈집에 더듬더듬 그것들을 잠가 놓고 가엾은 시인의 영혼은 텅 비었다.


기형도의 시를 읽으면 마른 손을 한 어머니의 가난과 여리고 연약한 어린아이가 상처받은 영혼으로 세상을 떠도는 듯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 시인에게 절망은 항상 가까이 있고 희망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거나 잡히지 않는 세계의 것이었나 보다.


1996년 1월에 구입했다고 쓰여 있는 나의 시집은 2022년이 흘러가는 가을 속에서도 쓸쓸하게 읽힌다.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썼던 시인은 일찍 떠나갔지만 그의 분신같은 시를 남겨 두었다. 바람이 점점 스산해지는 가을날, 조금쯤의 기적을 믿으며 살아가는 나는 다시 그의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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