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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은 숲 Mar 14. 2023

남이의 옥색 고무신

오영수의 <고무신>을 읽고

바다가 보이는 산기슭의 한 마을. 귀환 동포들과 가난뱅이 월급쟁이와 날품팔이들이 모여 사는 조용한 마을에 봄이 찾아왔다. 낮에는 모두 일을 나가 어린아이들만 햇빛바라기를 하고 있는데 마을의 무료한 아이들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엿장수의 등장이다.


가위를 째깍거리며 젊은 청년 엿장수의 타령이 들리면 아이들은 즐겁고 신이 나서 엿장수에게 달려간다. 뽀얀 엿가락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흐뭇해지고 맛보기로 엿을 하나 얻어먹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다.


철수 내외의 두 아이인 여섯 살배기 영이와 네 살배기 윤이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옆집 아이가 고무신을 가져와 엿을 바꿔 먹는 걸 보고 영이와 윤이는 집으로 들어가 옥색 고무신을 가져와 엿으로 바꿔 먹었다.


그 옥색 고무신으로 말하자면 철수 내외가 식모살이하는 남이에게 명절을 맞아 큰맘 먹고 해준 선물이다. 남이에게 옥색 고무신은 중요한 날에만 신는 세상 아까운 신발인 것이다. 그런 귀한 물건을 아이들이 엿장수에게 팔아먹었으니 남이는 속이 상하고 화가 났다. 그래서 엿장수에게 따질 것을 벼른다.


다음 날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가 들리자 남이는 엿장수에게 쫓아가 고무신을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영문을 모르는 엿장수는 남이의 자초지종을 듣는데 남이를 바라보는 청년 엿장수의 눈길에 호감이 가득하다. 그리고 고무신을 찾아 주겠다고, 없으면 새 신을 사다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 후로 엿장수는 이 마을에 오던 때보다 일찍 찾아와 아이들과 한참 놀다 가기도 하고 하루에 두 번씩 들르기도 하고 밤중에 몰래  남이가 사는 집 앞을 서성거리기도 한다. 어떤 날은 싱글벙글 거리며 아이들에게 엿을 한 가락씩 나눠주는데 영이와 윤이에게는 그중 큰 것으로 준다.


봄이 깊어가는 어느 날 남이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열여덟 살 남이를 시집보내야 하니 데려가겠다고 온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남이는 눈시울이 부은 채 분홍치마에 흰색 반회장저고리를 입고 떠날 채비를 한다.


3년 동안 보살폈던 아이들을 안아 주며 작별인사를 하는데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가 들린다. 남이는 재빨리 윤이를 업고 영이의 손을 잡고 엿장수에게 달려간다. 그리고는 어두운 눈빛으로 말없이 돈을 꺼내 엿장수에게 건넨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남이의 모습에 당황하며 돈을 건네받은 엿장수는 아무 말 없이 엿 몇 가락과 함께 남이에게 돈을 돌려준다.


집 안으로 들어온 남이는 영이와 윤이에게 엿을 쥐어주고는 보퉁이를 들고 떠난다. 철수 내외는 떠나는 남이의 뒷모습을 마을 중턱에서 바라보는데 남이가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새 옥색 고무신을 신고 가는 것을 본다.


곱게 차려입은 남이가 꽃놀이를 가는 줄로 짐작하고 울음 고개에 서서 남이를 눈으로 좇고 있던 엿장수는 남이가 한 영감을 따라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을 멀거니 바라본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참 애틋하다. 떠난다는 말도 못 하고 엿장수가 사다 준 옥색 고무신을 신고 떠나는 남이와 그런 남이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청년 엿장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엿장수는 찾을 수 없게 된 남이의 옥색 고무신 대신 새 옥색 고무신을 마련해 남이에게 주었을 것이다. 새 옥색 고무신을 남이에게 건네는 엿장수의 마음과 그 고무신을 받은 남이의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호감과 좋아하는 마음. 그런데 그들은 마음을 전하는 말 한마디 못 하고 이별을 한다.


오영수의 <고무신>은 1949년에 발표되었는데 유교적 전통이 풍속으로 남아 남녀가 내외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해선 지 표현하지 못한 사랑,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더 애틋하고 아련하다.


젊은 청년 엿장수는 남이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몇 날 며칠 마음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떠날 줄 알았으면 더 잘해 줄 것을… 좋아한다고 말이라도 해 볼 것을… 후회하고 안타깝고 서러웠을 것이다. 엿장수가 준 옥색 고무신을 신고 아버지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던 남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호감을 갖고 있다고 표현도 못 하고 마음에도 없이 아버지를 따라나서야 했으니 참 많이도 휑하고 착잡했을 것이다.


이루지 못한 것들은 그런 것 같다. 그것이 사랑이든 꿈이든 명예든 성공이든 이루어지지 않아서 미련이 남고 생각하면 아쉽다. 잡고 싶었으나 잡히지 않아서 혹은 잡지 못해서 먼 훗날까지도 잔금같이 회이 남을 것이다.


오영수의 소설 <고무신>은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고 그림을 보여주듯 묘사가 뛰어나서 충분히 음미하고 한껏 상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푸른 냉이가 솟아오르고 노란 민들레가 화안히 피어나는 봄날에, 울음 고개에서 남이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엿장수의 허전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음이 아련함을 불러와 긴 여운을 남기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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