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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은 숲 Oct 27. 2022

명태가 고래에게

김훈 <저만치 혼자서> (문학동네)

나는 여러 해 전에 작가 김훈이 쓴 장편소설 중에  <칼의 노래>와 병자호란을 다룬 <남한산성>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특히, 작가의 문장을 배우고 싶어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린 소설 <칼의 노래>는 필사를 했었다. 눈으로 만나는 문장은 쉬웠지만 빠르게 스쳐가는 의미로 소화하기 벅찼고 손으로 만나는 문장은 힘들지만 깊이 있게 받아들여져 편안하게 반추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김훈의 문장을 손의 질감을 통해 느꼈다. 그의 문장은 돌아가지 않고 직접 보여주는 방식으로 묘사하되 독자에게 상상의 공간을 남겨 놓는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여운이 길어서 오래도록 머릿속에 잔상이 남아있다.


이번에 읽은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곱 개의 이야기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데 하나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여운이 길었다. 여운이 길어서 머리가 뿌예지는 느낌이었고 내가 있는 공간과 책 속에 펼쳐진 공간이 함께 섞이고 일어나고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내가 살아서 경험하고 있는 시대와 내가 살지 않았던 시대와 내가 아직 이르지 못한 미래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가 경계 없이 들어와 산맥이 되어 일어나고 바다가 되어 출렁였다. 저 아득한 신석기시대, 바위에 그려진 긴수염고래와 향고래, 귀신고래와 돌고래들, 고래와 호랑이를 잡는 강인한 신석기시대 인간의 모습이 그려졌다.


작가 김훈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긴 이야기를 엮어내는 능력이 탁월한데 1948년생인 작가가 살아온 지난 세기의 현대를 오늘에 되살려 분석하고 연구해 짧은 이야기로 만들어 보여주는 실력도 탁월했다.


이번 책 <저만치 혼자서>에 실려있는 일곱 개의 이야기 중 내 마음에 가장 와닿았던 이야기는 '명태와 고래'였다. 주인공 이춘개는 강원도 동해안에 사는 평범한 어부다. 고향인 금강산 근처 어래진 포구에서 물고기를 잡아 반나절 거리 향일포에 가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 이춘개는 아내와 아이 둘, 배에 달라붙는 피난민들을 태우고 향일포로 넘어가 월남인으로 살아간다. 전쟁이 끝나고 산맥과 들에는 말뚝이 박히고 바다에는 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배를 가지고 이춘개는 어래진에서 그랬듯 향일포에서도 바다에 나가 명태를 잡아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 날 밤 명태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이춘개의 배는 방향을 잃었다. 포구가 보이고 잘못 들어섰다고 느끼는 순간 북쪽 경비정이 총을 쏘며 다가왔다. 북에서 이춘개는 6개월 동안 억류당했다가 풀려났는데 배는 증거물로 압수당했다. 이춘개는 남쪽으로 넘겨져 경찰과 정보기관에 다시 심문을 당하고 풀려난다. 배가 없어진 이춘개 가족에게 가난은 일상이 된다.


송환된 지 6년 만에 이춘개는 남쪽의 정보기관에 다시 체포된다. 그에게는 간첩죄와 보안법 위반, 수산업법 위반이라는 죄명이 씌워져 징역 14년 형을 선고받는다. 13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고 이춘개는 풀려난다.


교도소에서 받은 약간의 돈은 여인숙에서 지내며 두어 달 버틸 수 있는 정도다. 이춘개는 교도소에서 배운 서예를 기초로 여인숙에서 그림을 그렸다. 화선지에 바다와 포구, 마을을 그려 '바다와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수협 회관 복도에 전시를 했다. 전시가 끝나는 날 이춘개는 바다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이춘개의 죽음에 대해 작가는 세밀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자살인지 타살인지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나는 이춘개가 이념과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에 희생되었다고 해석한다.


 이춘개는 조상들이 그래 왔듯이 명태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나간 평범한 어부다. 전쟁의 공포가 그를 떠밀어 고향을 떠나게 했고 분단이라는 군사분계선이 그를 억류하고 그의 배를 빼앗았다. 억울한 감옥살이 끝에 밖으로 나온 이춘개에게 향일포에서의 삶은 또 다른 징역살이로 비쳐졌다. 가족은 소식 끊긴 지 오래고 이웃은 각박했고 집도 없고 밥도 없는 그는 가까운 바다에 풍덩 몸을 던졌을 것이다.


이념과 국가권력이 저지른 폭력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이춘개의 삶 전반에 걸쳐 나타난 일상적이고 제도적인 폭력이었다. 밥벌이 수단으로 명태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간 이춘개에게 합법적으로 남과 북이 저지른 폭력은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부서뜨리고 무너뜨렸다.


작가 김훈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학살과 고문, 인권침해 사례들이 담긴 보고서를 읽고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이 소설을 썼다고 밝힌다.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에서 작가는 이 땅에 태어나 이 땅에서 밥벌이하며 살아간 죄밖에 없는 수많은 이춘개들을 만났을 것이다.


작가는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생성된 마을을 그리고 섬과 바다를 묘사하며  그중에 한 명의 이춘개를 불러내었다. 그가 만들어낸 인물 이춘개는 관찰자 입장을 견지하면서 그려졌지만 소설을 읽고 나면 이춘개가 절망하고 억울해하고 포기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명태는 오호츠크해 한류가 흐르는 동해에서 번성했다. 남과 북이 갈라지지 않은 바다에서 명태는 고루 잘 잡혔고 남과 북이 갈라진 다음에도 명태는 동해안 어부들의 생계 수단이 되었다. 조류처럼 몰려오는 명태는 북에서 살았던 이춘개에게도 남에서 살았던 이춘개에게도 생활이고 현실이고 밥이고 뜨듯한 아랫목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작가의 문장 속에서 고래는 먼바다를 헤엄친다. 눈으로 보이지만 멀리 있어서 아득하고 닿을 수 없는 곳에 가 있는 희망이나 꿈같은 존재다. 어부들에게 명태는 가깝고 고래는 멀어서 명태는 현실이고 고래는 희망이라고 내 나름으로 해석한다.


분단된 시대에 태어난 나의 세대와 그 이후 세대에게 분단국가는 일상이 되었다. 일상은 평범해서 무뎌지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여지는데 작가가 그려낸 '명태와 고래'를 통해서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분단 시대가 얼마나 야만적인지 고통스럽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작가는 ‘명태와 고래’의 뒷말에서 고통과 절망을 말하기는 쉽고 희망을 설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춘개는 바다에 들어가 이 땅을 떠났을 것이다.


나는 국가 권력이 폭력으로 작동되어 수많은 이춘개들을 짓밟지 않고, 폭력으로부터 수많은 이춘개들을 보호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꾼다. 분단이 극복될 수 있는 삶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 생각한다.


바다에서 명태가 고래와 만나 미소짓기를, 그리고 이춘개의 영혼이 드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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