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역 도서관에서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어반드로잉 수업이 있었다. 가끔씩 혼자서 그림을 그리던 나는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이번이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수강 신청을 했다. 총 10주 동안 목요일마다 2시간씩 수업이 진행되었다.
서양화를 전공한 선생님은 첫 수업시간에 다른 지역 수강생들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오래된 간판이 걸려 있는 가게와 항아리가 잔뜩 쌓여 있는 장터 풍경 그리고 녹슨 대문과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담장 그림들이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그린 그림은 정겨웠고 따뜻해 보였다.
수업 시간에 배운 2점 투시
어반드로잉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나 마을, 여행지를 그리는 그림을 일컫는다. 보통은 일상의 풍경이나 건축물을 펜화나 수채화, 연필화 등으로 현장에서 보면서 그리는데 우리는 처음 배우는 입장이므로 도서관 강의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도시의 풍경 속에는 건물이 주로 보이는데 건물을 그리기 위해서 2점 투시를 배웠다. 2개의 소실점으로 3차원의 공간감을 표현하는 게 2점 투시이다.
처음 그려 본 어반드로잉
2점 투시를 배우고 선생님이 사진으로 보여준 건물을 피그먼트 라이너 0.1mm 펜으로 그려봤다. 설명을 듣고도 건물을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진 속의 건물과 그것을 보고 있는 내 눈과 눈을 따라 움직이는 손이 따로 놀았다. 수직선으로 표현되는 세로선과 소실점을 향하는 가로선을 제대로 그리기가 어려웠고 길이도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르게 그려지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수강생 여덟 명은 모두 다 비슷하게 그렸는데 초보자들의 그림을 본 선생님은 시범을 보여 주었다. 선생님의 그림에서 출입문은 살짝 열려 있고 커다란 창문은 어둡지만 흐릿하게 안쪽에 사물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림의 시작도 부분부터 자세히 그리기 시작하는데 출입문과 창문을 그리고 점점 확장해 나가는 식으로 그리는 것을 보았다.
전체를 먼저 그린 나와는 정반대의 방법이었다. 부분부터 자세히 관찰해서 그려야 디테일이 채워져 살아있는 그림이 되는 거였다. 그리고 세밀한 부분들이 모여져 전체가 완성되는 거였다. 집으로 돌아와 일주일 동안 같은 건물을 반복해서 여덟 번 그려보았다.
여덟 번째 그린 건물의 어반드로잉
펜 드로잉하는 방법을 배운 후에는 수채화에서 번지기 기법을 배웠다. 물감에 물을 얼마만큼 섞는지, 색을 어떻게 배합하는지 보면서 배웠다. 선생님이 색을 만들고 칠하는 과정을 통해 오래되어 녹슨 대문의 질감이 살아나고 세월의 때가 묻어있는 담벼락이 만들어지는 마술 같은 순간들을 지켜보았다.
적어도 30년의 세월 동안 그림을 붙잡고 살았을 전문가의 퍼포먼스를 구경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바라보고 꼼꼼하게 펜 드로잉을 하고 물감을 칠할 때는 조심조심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이 정성을 다해 칠해 나갔다.
선생님이 그리는 과정을 지켜보고 집에 와서 연습을 했다. 부분에서 전체로 그려나갔고 부분을 그릴 때는 자세히 관찰하고 색을 입힐 때는 물을 얼마큼 써야 하는지 생각하며 그렸다.
나는 햇볕 좋은 가을날 동네를 산책하면서 그리고 싶은 건물을 물색했다. 어반드로잉이니 내가 사는 지역의 특징을 담고 싶었는데 그만그만한 건물들 사이에 서 있는 망루가 눈에 들어왔다. 망루는 한국 전쟁 당시에 지역을 지키기 위해 1951년, 돌과 시멘트를 섞어 찰쌓기 방식으로 축조된 것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2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높이 10미터인 망루는 팔각지붕을 이고 있는데 망루의 몸통을 그리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어반드로잉은 펜으로 그리기 때문에 지우개로 지울 수 없어 중요한 선을 잘못 그리면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그래서 오래 관찰하고 생각해야 잘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가르침이 그리면서 새록새록 떠올랐다.
우리 지역 망루 어반드로잉
망루만 몇 번을 그려보고 전체를 펜 드로잉으로 먼저 그렸다. 망루에 쌓여 있는 돌을 얼마나 자세히 펜 드로잉으로 표현해야 하는지 기준을 잡기 힘들었다. 고민을 하다가 노란색과 연한 색 돌들을 중심으로 펜 드로잉을 했다. 왼쪽건물과 망루 뒤쪽 건물 벽에 붙여진 외벽 마감재는 펜으로 자세히 그렸다.
어반드로잉을 배우고 그려보니까 그냥 스쳐 지나쳤던 건물이 자세히 보이고 새롭게 보였다. 도시가스 배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봇대와 전깃줄은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보게 되었다. 지나쳐 버리던 동네 골목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와 우리 동네 골목길 풍경을 그려보기로 했다.
우리 동네 골목길 어반드로잉
처음에는 하얀 페인트가 깔끔했었을 벽이 시간의 흔적으로 때가 탔고 오래된 시멘트 블록 담장은 깨지기도 했고 벽을 뚫고 설치된 선들, 도시가스 배관과 창살이 설치된 창문들, 감나무와 공터에 심은 고추와 화분들, 멀리 보이는 전봇대와 전깃줄, 그리고 그림자 진 거리 풍경들이 관찰되었다.
그것들을 펜으로 드로잉 하면서 나는 나이 먹은 동네 어르신들의 일상적 삶을 마주 대하는 느낌이었다. 집과 함께 늙어가고 있지만 먹거리를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일상적 삶이 초록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반드로잉은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케 해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순간으로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내가 그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관찰해서 제대로 표현해 보고자 하는 에너지로부터 생성된다. 그래서 어반드로잉을 통해 동네 골목의 평범한 일상은 특별한 순간으로 바뀐다.
시멘트 블록 담장이 있는 집 어반드로잉
전봇대와 전깃줄이 도시의 미관을 해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나는 전봇대와 전깃줄을 자세히 관찰하며 언젠가 전봇대와 전깃줄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오래되어 때 묻고 방치된 집이 눈에 거슬렸는데 언젠가는 사라져 갈 낡음도 그려보고 싶다. 시멘트 블록을 한 장 한 장 쌓듯이 그리려 노력하고 파란색 대문의 오래되어 낡은 색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한다.
가치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혹은 권위 있는 전문가가 인정해 줌으로써 생기기도 하지만, 허술하고 낡아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남김으로써 그것대로의 가치를 지니게 되지 않나, 어반드로잉을 배우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관찰함으로써 대상에 정성을 쏟으며 몰두하게 되고 그러면 사물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특별한 것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일상의 평범함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아름다움이라는 가치가 멀고도 특별한 곳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살고 있는 일상적 삶과 사물에도 깃들어 있다는 오래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어반드로잉을 통해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삶과 세상을 다시 한번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