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의 추억을 찾아서
올여름의 더위는 유난한 것 같다. 매일같이 35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으로 거리는 열기 가득한 찜질방 수준이다. 양산을 받쳐 쓰고 걷는 데도 얼굴에 땀이 쏟아진다. 내리쬐는 땡볕에 화단에 심은 국화잎이 시들어가고 풀과 나무들도 작열하는 태양볕에 지친 듯 보인다.
그 와중에 이웃의 청포도는 알알이 영글어가고 배롱나무에 피어있는 백일홍 꽃은 빛깔이 향기롭다. 폭염 속을 걸어가며 나는 배롱나무의 진분홍빛 꽃과 싱그러운 청포도를 찍어 본다. 폭염 속에서도 꽃 피고 열매 맺고… 무더위가 주는 선물도 있는 것 같다.
계속되는 폭염이 가져온 무력감으로 올여름은 잘 버텨보자는 생각이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여름휴가를 가졌고 주로 그림을 그렸다. 요즘 나는 방앗간 풍경을 그린다.
어릴 적 설이 가까워 오면 엄마는 불린 쌀을 방앗간에 가져가서 흰떡을 빼 왔다. 엄마를 따라서 방앗간에 갔던 어린 나는 동그란 구멍에서 뜨거운 김을 뿜으며 하얀 가래떡이 나오는 장면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끝도 없이 나오는 가래떡을 방앗간 주인은 적당한 길이로 끊는다. 끊어도 끊어도 기다랗게 흰 가래떡은 이어지고 그렇게 나오고 자르다 보면 가래떡은 수북해진다.
금방 나온 흰 가래떡을 집에 가지고 와 조청이나 꿀에 찍어 먹으면 그만한 별미가 없다. 부드럽고 담백하고 따듯하고 달콤한 맛이 한꺼번에 섞여서 입 안에 가득 찬다. 그리고 가래떡이 적당히 굳으면 엄마는 도마 위에 적당히 마른 가래떡을 올려놓고 칼로 비스듬히 썰어 떡국떡을 만들었다.
설날 아침, 우리 일곱 식구와 멀리서 온 친척들은 엄마가 갈비탕 국물로 끓인 떡국을 먹었다. 어린 시절 방앗간에서 시작된 기억의 편린들이 설날 떡국까지 시간 여행을 하게 만든다.
농사를 지으시던 시부모님은 단골 방앗간이 있었다. 들깨 농사를 지어 방앗간에 가 들기름을 짜고 고추 농사를 지어 말린 고추를 방앗간에 가지고 가서 고춧가루를 만들었다. 무슨무슨 날이면 방앗간에 가 떡을 찧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들기름과 고춧가루와 떡들은 자식인 우리에게로 와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시부모님이 농사지은 일용할 양식들이 방앗간을 거쳐 우리에게로 왔다.
지금은 모두 세상에 안 계시지만 그렇게 보고 길들여져서일까, 나는 여전히 방앗간에서 짠 들기름과 참기름을 사 먹는다. 자주 들락거리게 되다 보니 단골 방앗간이 생겼다.
어반 스케치 동아리 모임에서 하나씩 주제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데 나는 방앗간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들기름을 사러 들른 김에 주인아저씨에게 방앗간 사진 좀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아저씨는 뭐 찍을 게 있나요, 하시면서 허락해 주셨다.
우선, 방앗간 안에는 몇 개의 기계가 있었다. 찾아보니 곡물분쇄기라 부른다. 쌀이나 잡곡류를 넣으면 가루가 되어 나오고 고추도 마찬가지다. 그 기계를 보고 있으려니 늙으신 시부모님이 어렵게 농사를 지어 만들어주신 고춧가루가 생각났다. 시어머님이 주신 고춧가루가 이런 기계에서 만들어졌겠구나, 싶어서 기계를 그려보고 싶어 사진을 찍어왔다.
세월의 더깨가 묻어 방앗간의 터줏대감이 분명한 오래된 기계들, 그러나 바지런한 주인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보이는 기계들, 위쪽 선반에는 채반을 비롯한 고무대야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기계를 스케치하고 수채 물감으로 칠하면서 곡물 분쇄기를 조금쯤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사와 스프링, 벨트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부속품 하나하나에 만든 이의 정교한 손길이 필요했겠다 싶었다.
들기름을 사서 가방에 넣고 방앗간을 나와 주인아저씨의 허락을 받은 만큼 스스럼없이 외부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앞쪽에서 사람이 없는 풍경과 사람이 있는 풍경 등을 찍어왔다. 이번 그림에는 건물만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을 넣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방앗간을 풍경으로 수돗가에서 주인아저씨가 들깨를 씻고 있는 장면을 그려 보았다.
노란 고무장갑을 끼고 쭈그려 앉은 아저씨의 수그린 얼굴에는 파란색 대야에 들어있는 들깨만 보일 것이다. 들깨를 깨끗이 씻어서 들깨가 들기름이 될 때까지 아저씨는 자신의 노동력을 쏟아부을 것이다. 내가 사 먹는 들기름이 되어가는 과정 중 하나인 들깨 씻는 주인아저씨의 노동을 그리며 나는 일하는 사람만큼 집중하고 공들여 스케치를 하고 색을 입혔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공을 들이고 노력을 해야 하는 노동이다. 나의 시간을 들여서 유형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만들어내는 과정의 힘듦 속에서 힐링이 되고 성취감을 느낀다. 그로 인해 감상하는 이에게 조금쯤 도움이나 위로와 같은 좋은 에너지가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폭염 속에서 영글어가는 청포도처럼, 무더위 속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처럼 더위를 견디고 다가올 태풍을 견디다 보면 어느덧 우리 앞에는 시원한 가을이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