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묘하고 독특한

여행 그리고 어반드로잉

by 밝은 숲

베네치아는 참 묘하고 독특한 도시다. 3년 전에 다녀온 베네치아 풍경을 어반드로잉으로 그리면서 나는 베네치아를 다시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3박 4일 동안 머물렀던 그 도시의 물과 분위기가 떠올랐다. 베네치아의 독특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묘한 도시 분위기는 무엇 때문인지 글을 쓰며 생각해 본다.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역에서 기차를 타고 볼로냐와 파도바를 거쳐 종점인 베네치아의 산타 루치아역에 내린 건 2019년 늦가을이었다.

베네치아 산타 루치아역 앞 풍경(2019년)

11월이 다 지나가는 오후 3시의 베네치아는 봄날처럼 온화하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산타 루치아역을 빠져나오니 눈앞에 대운하가 펼쳐져 있었다. 처음 보는 물의 도시의 낯선 풍경은 멋지고 시원스러웠다.


도로 대신 운하가 길이 되는 도시, 횡단보도가 없고 물 위에 놓인 다리가 길이 되는 도시, 시내버스와 자가용 대신 바포레토(수상 버스)와 배들이 교통수단으로 이용되는 도시는 새롭고 이색적이었다. 베네치아는 어디서나 물결이 출렁거리고 물길을 걸어 다니는 게 일상이며 도시의 풍경 속에 바다는 언제나 함께였다.


다음 날 아침, 사이렌 소리가 요란해서 잠이 깨었다. 여행 동반자인 친구와 동생과 나까지, 우리는 무슨 일인가 놀라서 숙소 밖으로 나가 보았다. 건물 관리인에게 물으니 만조를 알려주는 사이렌이라 한다. 아침을 먹고 나오니 인도는 이미 물길이 되었고 출입문 안까지 물이 들어올 것만 같았다. 만조가 된 아침의 거리는 온통 물로 가득 차 무릎까지 올라오는 비닐 장화를 사 신어야 했다. 신발 위에 비닐 장화를 덧신고 우리는 오늘의 목적지인 부라노 섬에 가기 위해 선착장으로 향했다.

폰다멘테 노바역으로 가는 길은 발목 넘어까지 물이 차올라 물길을 헤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데 힘이 들었다. 선착장까지 가는 길이 고난의 행군이어서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몸은 지치고 발은 물에 젖어 비닐 장화가 무용지물이었다.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았던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배를 타고 바라본 베네치아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바다 곳곳에 떠 있는 섬 위에 지어진 건물을 배경으로 유서 깊은 이 도시는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물길을 헤치고 걸어온 아침의 고됨과 젖은 발의 축축함이 조금씩 잊히고 있었다.

베네치아 부라노섬 어반드로잉(펜과 색연필)

부라노 섬은 작은 어촌 마을인데 소박한 집들을 알록달록 색칠해 운하와 함께 한 풍경이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그냥 아무 목적 없이 운하가 있는 거리를 거닐고 노랑과 주황과 파랑과 연두색으로 칠해져 있는 작고 아담한 집들을 바라보고 동행한 이들과 사진을 찍으며 여유롭게 하루를 보냈던 게 기억난다.


베네치아에서 아침은 항상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사이렌 소리가 울려 잠이 깨면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여명으로 희미하고 길 대신 작은 운하가 흐르고 그 사이로 작은 다리가 놓여 있다.


창문을 열면 바로 아래에 바닷물이 흐르는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여행객으로서 너무나 낭만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길을 나서는 순간 인도까지 올라온 물은 걸음을 옮기는데 장애가 되고 물길은 고난의 행군이 되어 버린다. 베네치아는 그런 곳이었다, 보기에는 아름답고 살기에는 불편한.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2019년)

베네치아에서 사흘째, 비닐장화를 신었음에도 축축해진 발로 오전에는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을 돌아보고 오후에는 산 마르코 광장에 갔다. 베네치아의 중심지이자 여행자들이 필수로 들르는 이곳에는 산 마르코 대성당과 두칼레 궁전이 있다.


처음 본 산 마르코 대성당 외관은 웅장하고 화려했는데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피렌체의 두오모와는 다른 결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서방의 건축 양식인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에 더해 동방의 비잔틴 양식을 골고루 갖춘 베네치아가 만들어 낸 독특함 때문인 것 같다.

산 마르코 대성당 천장 모자이크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인 성 마르코를 기리기 위해 천 년 전에 지어진 성당은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도 비잔틴 양식의 고풍스러움과 화려함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본 천장의 황금빛 모자이크는 오랜 시간이 무색하게 아름다웠고 장인들의 노고와 정성이 느껴졌다.


대성당의 화려함과 웅장한 규모는 옛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광과 힘을 보여주는 상징인데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베네치아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약탈해 온 동방의 보물과 전리품들로 성당이 꾸며졌다는 것은 종교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산 마르코 대성당 펜드로잉

여행할 때 찍어 온 산 마르코 대성당의 정면을 그려 보았다. 수없이 많은 기둥들이 성당을 떠받치고 각각의 아치 안쪽에는 성화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고 성당 위쪽과 각각의 첨탑에는 천사와 성인들이 조각되어 있다. 0.1mm 펜으로 대성당의 조각품과 모자이크 그림들, 아치와 벽체의 장식들을 그리다 보니 이 성당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자신의 재능과 정성과 힘을 들여 만들었을지 상상하게 된다.

산 마르코 대성당에서 바라본 풍경, 왼쪽이 두칼레 궁전

산 마르코 대성당 옆에는 흰색과 분홍색 대리석이 교차해서 아름다움을 더하는 그리고 흰색의 아케이드가 아름답게 장식된 두칼레 궁전이 있다. 두칼레 궁전은 9세기에 통치자인 도제의 관저로 지어진 건물이면서 공화국 정부 건물로도 쓰였는데 15세기까지 개보수를 거듭해 오늘날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두칼레 궁전은 서방의 고딕과 동방의 비잔틴 양식이 결합된 가장 베네치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는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꾸며져 우리는 내부를 돌아볼 수 있었다.

두칼레 궁전 안뜰(2019년)

베네치아의 11월은 일찍 해가 져서 오후 4시가 넘으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산 마르코 광장의 어수선한 분위기와 달리 두칼레 궁전의 내부는 인적이 없어 고요했다. 비가 내려 바닥을 적시고 노란 불빛과 이어진 아치들, 물 위에 비친 하얀 기둥들, 안뜰에서 바라보는 어스름 녘의 궁과 저 너머 대성당의 돔이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시대로 여행자를 안내하는 것 같았다.


궁전 내부는 상상 외로 화려하고 압도적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동지중해에서 패권 국가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두칼레 궁전의 화려함, 압도적인 그림과 금으로 치장한 장식들로 설명되는 것 같았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로 알려진 틴토레토의 <천국>(22 x 7m)이 있다. 그밖에 수많은 베네치아 회화와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장엄한 스케일과 화려함에 넋을 잃고 구경했는데 정말 와 보길 잘했다는 의견에 우리 셋은 모두 동의했다.

두칼레 궁전 안뜰 어반드로잉

두칼레 궁전과 성당의 돔이 보이는 안뜰의 풍경을 그려보았다. 먼저 4층으로 이루어진 두칼레 궁전을 한 층 한 층 피그먼트 라이너 펜으로 쌓아 올렸다. 며칠 동안 펜 드로잉을 하고 수채화로 색을 입혔다. 펜 드로잉을 하다 보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자세히 살펴보게 된다. 건물 사이사이에 새겨진 돋을새김들, 2층 계단 끝과 첨탑 끝마다 조각되어 있는 성인들, 궁전의 아치와 기둥 모양을 세밀히 관찰하게 된다. 눈과 손의 협동 작업은 쉽지 않아서 따로 놀 때가 많지만 그래도 시도하고 다시 한번 보고 다시 또 손을 움직인다. 그리는 데 집중하는 시간에는 오직 대상과 나만 존재한다. 세상이 아주 단순해지는 몰입과 세상이 하나로 집약되는 몰두를 경험한다.


산 마르코 대성당을 설계하고 조각하고 모자이크를 하나하나 만들어 붙였을 장인들, 두칼레 궁전의 아치를 다듬고 기둥을 세운 수많은 노동자들은 더 많은 인내를 가지고 더 오래된 기술과 재능을 품고 더 많은 공을 들여 몰입하고 몰두했을 것이다. 아름답고 찬탄할 만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의 노력과 열정이 필요하다.

리알토 다리와 베네치아 풍경(2019년)

베네치아라는 도시도 그렇게 만들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베네치아인들은 자신들이 터를 잡은 땅이 건물을 세울 수 없는 습지인 지형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개펄에 나무 말뚝을 박아 기초를 만들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노동력을 들여 건물의 기초를 쌓아갔다. 그 위에 돌을 얹어 건물을 짓고 도시를 만들어 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베네치아는 물의 도시가 되었다.


베네치아가 갖고 있는 독특함은 열악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지형적 환경을 노동으로 극복한 인간의 의지와 인내심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우리 눈에 보이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풍경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바다 깊숙이 박혀 있을 옛사람들의 삶에 대한 의지와 나무 말뚝 덕분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 본다.


눈을 즐겁게 하는 화려함이나 웅장함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눈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나 낭만은 어디에서 왔는지, 참 묘하고 독특해서 아름다운 도시, 베네치아를 그리고 추억하며 드는 생각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