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빠의 기호식품 넘버원은 소주인 것 같다. 아니, 소주다.
쫄쫄이 내복을 입고 소꿉놀이를 하던 내가 아빠 흉내를 내며 "여보 나 회사에서 소주 먹고 올게"라고 하며 엄마를 뒤집어지게 웃게 했던 날이 있으니, 그때부터 나는 아빠의 소주 사랑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사춘기 땐 아빠가 술을 마시는 게 싫어서아빠에게 화도 많이 냈었다. 물론 지금도 좋진 않지만, 아빠가 건강할 때 즐길 수 있는 취미생활이라고 생각을 하고 부질없는 잔소리를 멈추기로 했다.
안주(按酒)에 사용되는 한자 안(按)은 '부추길 안'이 아니라, '누를 안'이라고 한다. 세상에나. 혹시 음식이 술을 차곡차곡 눌러서 술이 들어갈 공간을 더 확보하게 한다는 뜻인걸까. 아빠의 취미생활과 함께하는 안주는 좀 다양했다. 고기나 제철 생선회를 안주로 주로 드시지만, 찌개, 라면, 두부김치를 안주로도 초록병 한 병을 후딱 비워내신다. 치킨과 소주까지는 어떻게 이해를 해보겠는데 고구마피자와 소주를 드실 땐 좀 의아했다. 호기심에 한번 따라해봤는데 일단 내 취향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음식이 맛만 있으면 아빠에게는 좋은 술안주가 되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얼마 전 엄마 아빠와 자주 가던 집앞 돼지갈비집에서 외식을 했다. 주인 분께서는 우리 식구를 발견하자 마자 늘 먹던걸로 3인분을 내주시며 빠르게 반찬을 세팅해주셨고 아빠는 더 빠르게 소주 한 병을 주문하셨다. 술을 잘 안드시는 엄마도 그날 두 잔 정도를 드셨고 나도 고기를 굽다가 먹다가 어쩌다보니 세 잔 정도 마시게 되었다. 순식간에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다섯 잔이 넘어가자 살짝 취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술쟁이들 여기에 놓고 먼저 집에 가겠다며 일어나셨고 아빠와 나는 1인분 추가한 고기랑 남은 술이 아깝다며 다 먹고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와 둘이서 술을 먹게 되었다.
고기도 이미 다 구워졌고 시선을 따로 둘 데도 없어서 쓸데없이 뉴스 얘기를 좀 하다가, 자연스럽게 얼마 전에 최종면접에서 나를 떨어뜨린 회사 얘기로 넘어갔다. 그 회사라면 차라리 떨어진 게 잘됐다며 어차피 그 회사 그 직무는 여직원 차별이 심하기로 소문이 나있다며 실컷 욕을 해주셨다. 왜 나는 잊고 있던 얘기를 갑자기 꺼내시냐고 할까 하다가 그냥 나도 맞장구를 쳐버렸다. 맞아, 난 난 년이라서 더 좋은데 갈 거라고 했다. 한참동안 이것저것 걸리는 것들을 마구 씹어대다가, 아빠가 말했다.
"늦은거 하나도 없다, 그니까 니가 좋아하는 일 찾아서 스스로 먹고 살 수 있을만큼 돈벌고, 그러고 나면 사는 게 좀 더 낫다. 올해까지는 하던거 계속 해라."
그 말을 듣고 참 위로가 많이 됐고 더 풀이 죽었다. 내가 아빠를 너무 모르고 있었구나, 사실은 누구보다도 더 큰 내 편이었을텐데 매번 면접 결과가 궁금해서 넌지시 묻는 아빠에게 날이 선 대답만 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아빠, 나는 좋아하는 일이 뭔지 아직 모르고 계속 하던 일이 없어가지구...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2.
엄마의 기호식품은 두말 할것도 없이 커피다. 물론 단팥빵도 너무 좋아하시지만 매일 드시진 않는다. 하지만 노란 봉지에 든 믹스커피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즈음부터 우리집에 매일 있어야 하는 엄마의 간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른말은 잘들었지만 호기심은 많았던 초등학생 때, 엄마가 전화 통화를 하느라 길게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엄마가 남긴 믹스커피에 에이스를 찍어먹다가 자주 빠뜨렸다. 증거를 인멸하려고 티스푼으로 커피에 푹 젖은 과자를 떠서 입에 넣을 때마다 과자에 배인 커피의 쓴맛에 저절로 온몸을 꿈틀거렸다. 아빠의 소주만큼이나 엄마의 커피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어른이 되면 혀가 바보가 되는게 아닐까 싶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엄마가 '커피'를 좋아한다는 생각에 가끔 엄마와 외출을 할때면 아메리카노를 두 잔 사서 한 잔을 내밀며, 나는 세상에서 진짜 엄마를 많이 생각하고 센스가 넘치는 딸래미라고 착각을 했던 적도 있다. 그리고 엄마에게 처음 아이스 헤이즐넛 라떼를 사드린 날, 고급진 믹스커피 맛이 난다고 엄마는 좋아하셨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서 엄마의 기상시간에 맞춰서 모닝 '믹스커피'와 구운 토스트 식빵을 대령해드린 날, 엄마가 가장 행복해하셨다. 니가 준 커피 중에 제일 맛있다고.
몇 년 전, 인턴으로 근무하면서도 구직활동을 계속 해왔지만 번번이 서류에서부터 떨어지는 날이 많아지면서 나는 정규직 직장 대신 다시 계약직, 인턴직 자리도 알아보고 있었다. 길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을 하는 동안에는 내가 어딘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 이젠 다른 일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리고 글을 쓰고 싶어졌다. 한창 드라마 대본과 소설을 읽을 때여서 그런지, 아니면 자기소개서에서 습관적으로 나를 양심껏 포장하는 버릇에서 비롯된 것인지 몰라도, 뭔갈 만들어내고 지어내고 그래서 재미나게 풀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진행하는 드라마 아카데미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짧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수강료를 내면 몇 개월 동안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등록마감일이 이틀 정도 남아있어서 망설일 틈이 없었다.
인턴 월급으로 모은 얼마 안되는 돈을 긁어모아서 수강료를 만들었다. 안방에 있는 엄마한테 가서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글을 써보려고 하는데, 또 방에 처박혀 있는다고 해서 걱정하지 마시라고.
그리고 다음날, "돈은 이걸로 하고 난 우리 딸이 진짜 작가가 됐으면 좋겠다!"며 엄마가 카드 한 장을 주셨다.
아냐, 제가 모은 돈으로 할게요, 엄마! 라고 했어야 했는데 뻔뻔스럽게 카드를 받아들고 "오 엄마 땡큐!"하면서 쌍엄지척을 날리며 카드를 받아들었고 등록하러 가는 길에 조금 울었다. 미안함과 고마움과 감사함을 저렇게 밖에 전하지 못한 나의 한심함과 쪼잔함, 그것보다 조금 더 한심하고 쪼잔한 통장 잔고가 내 현실이었다.
#3.
각자의 기호식품에 강한 애정을 갖고 계신 두 분은 서로의 기호식품뿐만 아니라, 여러가지로 불일치하는 부분이 더 많은 것 같다.
골프 채널을 선호하는 엄마와, 자연인들의 산속 생활 프로그램을 선호하는 아빠,
가끔 술에 취하면 나와 엄마에게 윙크를 날리는 애교가 넘치는 아빠와, 그런 애교는 할 줄도, 받을 줄도 모르는 엄마, 그리고 나.
오늘의 의견 차이는 술먹고 다른 사람한테 전화 거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엄마와, 술을 먹었으니까 술김에 그냥 전화해보는 거라는 아빠의 주장에서 시작했다. 역시 결론은 없었다. 서로가 참고 사는 거라고 하시지만 매일 보고도 또 그렇게나 할 얘기가 많으신 두 분 사이에서, 나는 남은 냉동회와 소주를 먹었고 식후에는 믹스커피를 마시며 TV 예능을 자막으로만 감상했다. 두 분의 식성은 골고루 물려받은 내가 두 분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긴 하는걸까.
저렇게 다른 두 분이 각자의 방식으로 묵묵하게, 그리고 화이팅 넘치게 나와 그리고 내 동생을 응원하고 계시니, 우리는 아마 어떤 식으로든 잘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인 것 같다. 뭐가 됐든, 언제가 됐든 내 편인 사람들에게 잘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