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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한 Oct 19. 2022

오늘 같은 날, 음악


#1.

직장생활과 먼 생활이 길어지면서 사회생활이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친구와 간간히 카톡은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에서 한 달에 한 번으로, 그리고 지금은 거의 분기에 한 번꼴로 연락을 할 정도로 뜸해져버렸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이렇게 이질적으로 느껴질 일이었나. 그래서 혼자 가는 카페에 익숙해졌다. 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대부분 입사지원서를 쓰는 데에 시간을 보낸다. 이상하게도 집에서는 집중이 잘 안되는 날에 카페를 가면 의외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다. 커피값이라도 하고 집에 가겠다는 마음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나 말고도 입사지원서를 쓰는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모종의 경쟁의식을 느껴서일까. 그런 이유 때문에 커피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집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의 단골이 되어버렸다.


스타벅스를 갈 때면 항상 이어폰부터 챙긴다. 나는 지정석 같은 창가 근처 자리에 앉아서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앉은 자리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을 느끼며 어떤 글을 쓸 지 생각을 한다. 집중력이 조금 올라가기 시작할 무렵, 유선 이어폰을 꺼내서 노트북과 연결하고 글을 쓸 때마다 듣는 플레이리스트를 연다. 하루는 기리보이, 하루는 우원재, 또 다른 날은 데이먼스이어, SURL, 그리고 브로콜리너마저.



#2.

이 계절엔 브로콜리너마저를 들어야 한다. 반드시 1집, 무조건 계피가 보컬로 있었던 시절의 1집으로 들어야 하는 게 내가 글을 쓸 때의 룰이다.

어떤 날은 '사실 나 그래도 니가 보고 싶었어 보고싶어서 미칠 뻔 했어'라는 <편지>의 노래가사를 입으로 따라부를 뻔 했다. 그 조용한 공간에서 한순간에 구여친 레파토리를 하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내가 써야 할 글에 집중하려고 노력해본다. 나의 성장과정, 직무를 위해 노력해온 것들, 그리고 지원동기와 입사 후 포부..

어떤 부분에서 얼마만큼 솔직해져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수 백 곳에 지원을 했고 수 십 건의 면접을 보면서도 나는 눈치가 없는 건지 센스가 없는 건지 이런 건 도무지 체득되지가 않는다.


어떤 날은 노래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줄줄 글만 써내려가곤 하지만, 어떤 날은 정말 단 한 자도 떠오르지 않는 날이 있다. 썼던 글을 다 지워버리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결국은 노래에 맞춰서 떠올리지 말았어야 할 과거가 떠오르곤 한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한 때는 브로콜리너마저를 듣지 않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앨범 플레이리스트와 맞물려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나는 뒤로, 과거로, 옛날로 돌아가 거기에서 발목을 잡힌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음악 자체를 듣지 않게 되었다.


손절했던 음악을 다시 듣기 시작한 건 SURL과 데이먼스이어 덕분이었다. 몽환적인 음색에 빠져서 같은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현실이 잠깐 잊혀졌고, 수 십번의 반복이 끝날 때 즈음 내가 존재하고 있는 공간이 다시 느껴졌다. 여기는 브로콜리너마저를 듣던 예전이 아니라, 내 나이 앞자리가 두 번 바뀐 2022년이고 스타벅스 어느 구석자리라는 현실을 온몸으로 자각한다.



#3.

오렌지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할 수록 오렌지가 떠오르는 것처럼, 과거는 잊으려고, 떠올리지 않으려고 할 수록 잊혀지지 않고 자꾸만 현실에 침투하는 습성이 있다. 이 사실을 일기장 어딘가 적어놨기도 했던 것 같은데 매번 까먹는다. 까먹을 때마다 음악을 듣다가 문득 슬퍼지고 무기력해진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아이스가 다 녹고 아메리카노라고 부를 수 없을만큼 연해져버린 커피를 단숨에 마신다. 오늘은 커피값을 하지도 못한 한심한 하루를 보냈다고 자책하기 보다는, 이 또한 언젠가는 기억할 수도 있고 까먹을 수도 있는 시간의 일부일테니 오늘 하루는 이렇게 한 꼭지 기록해 둔 걸로 만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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