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생 신분을 벗어나 원하지 않았던 대학의 입학을 기다리며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한창 친구들이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갈아타며 카카오톡이라는 노란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할 때에도 나는 피처폰과 문자메시지를 이용하고 있었고, 드디어 클럽을 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집 앞 놀이터에 나가서 그네나 몇번 굴리다 오는 21살이었다. 그냥 시간이 빨리 흘러서 나에게 실망한 부모님 곁을 빨리 떠나드리는 게 효도일 것 같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어릴 적, 예체능을 일찍부터 시작한 동생 덕분에 나는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대회에 따라가서 멍하니 있어야 하는 일이 많았다. 동생이 생각 외로 잘해서 큰 상이라도 받는 날엔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 부모님이 좀 밉고 동생에게 질투가 나기도 했다. 동생이 받는 메달, 트로피와 상장도 부러웠지만 두둑한 상금 봉투를 받아오는 걸 보면 부모님의 표정은 밝아지셨다.
어느 날은 내 방에 있어야 할 피아노가 없어졌다. 동생의 개인 과외에 쓸 급전이 필요했던 상황에 내 피아노가 산 가격의 반도 안되는 가격에 중고로 급하게 팔려간 것이다. 그래도 내 생각을 조금 해주신 건지 아니면 애매하게 돈이 남아서인지, 내 방 피아노가 있던 자리엔 나무 책상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회색 의자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돈이 없어서 그랬잖니, 넌 어차피 피아노 안치고 전공할 것도 아니고. 누나가 양보해야지."
그때부터 나는 세상에서 돈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돈이 없으면 좋아하는 것을 할 수가 없다. 돈이 생기면 좀 더 가능성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것이 맞다.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이 있는 거다. 뭐 그런 생각들을 하고나니 여러가지 원망이나 미움들이 가끔씩은 잊고도 살아졌다.
근데, 대학생이 되면 무엇이든 알아서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은 좀 미웠다. 뭐든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여전히 내 한학기 등록금 정도의 회비를 매달 내며 예체능 공부를 하는 동생과, 요식업 가게 주방에 일을 하러 다니는 엄마, 한 회사를 몇 십년을 다니는 아빠를 보며 나는 용돈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선을 넘는 거였다.
당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돈이 없으면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말처럼 느꼈다. 누구는 바람쐴 겸 다녀온다는 유럽권 국가 교환학생을 위해서도, 내가 좋아하는 밴드동아리 활동을 하기 위해서도, 정말 친해지고 싶은 동기나 후배와 밥 한끼나 커피 한 잔을 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아동복 가게 아르바이트와 중고등학생 과외, 복수전공 과목 공부를 쳐 내기에도 바쁜 대학생이었다. 사람과는 점점 멀어졌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스펙도 그닥 좋지 않고, 부모님이 추천하는 복수전공을 선택해버렸고 그 과목 공부를 쳐내느라 바쁜, 그냥 화석이라고 불리우는 학번 높은 대학생이 되었다.
어느 수업에서 영화를 보고 감상평을 써내는 과제가 있었다. 간만에 쓰는 자유로운 글이었기 때문에 나는 영화를 4번이나 봤고 글을 10번 정도 고쳐서 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메일로 과제를 제출한 다음 날, 한 문예창작과 교수님께서는 내 글이 주는 공명이 너무 좋다며, 대학원 진학을 진지하게 제안하셨다. 당시 돈이 있어야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과제에 대해 좋은 평가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고 아쉽게도 그 이후로 더 이상의 제안은 없었다.
사실 기대에도 못미치는 수능성적표를 두 번씩이나 받아온 나에게 부모님이 야박하게 구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항상 내 진로 선택권을 쥐고 있는 부모님께 불만이 많았고 그게 졸업을 앞둔 학기에 폭발해버렸다. 나에게는 공부가 아닌 다른 재능을 바라봐주지 않으신 부모님이 미웠고, 부모님 지원을 쭉 받으며 잘나가는 동생이 미웠고, 아무 생각 없이 대학생활을 했던 내가 등신 같았다. 왜 나는 바보처럼 내 생각을 한 번도 제대로 말한 적이 없었는지, 하고싶은 일을 찾으려는 노력조차도 제대로 한 적이 없는지 화가났다.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독립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조감이 들었다.
계약직을 전전하며 돈이란 걸 조금씩 모으기 시작하면서 나는 자존감을 회복했다. 내가 그토록 벌고 모으고 싶어했던 돈, 이백 만원도 안되는 월급이었지만 매달 부모님께 조금씩 드렸고 명절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봉투를 내밀어보기도 하면서 나는 스스로가 치유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하고싶었던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앞으로도 쭉,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발적 퇴사 이후 2년을 채워가는 구직기간동안 뭘했냐는 친구의 물음에 나는 글을 쓰고 있다고 대답했다. 하루 방문자 수와 글 조회 수를 합쳐봤자 20도 안되는 니가 지금 그러고 있을 때냐는 친구의 뼈있는 잔소리에 웃으며 대답했다. "OO아, 내가 지금 좀 쓸모없다고 해서 죽을 순 없잖아ㅋㅋㅋㅋ"
친구는 그런 뜻은 아니었다며 사과를 했고, 나도 그냥 웃고 넘기자고 한 말이라며 사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대화 주제를 옮겨갔다.
친구의 말에도 충분히 동의한다.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이 한두 번 읽는 글을 계속해서 쓴다는 게 과연 효율적이고 생산적인지, 나의 장래와 밥벌이에 도움이 되는지는 생각을 해 볼 일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객관적이고 정량화된 팩트로 나를 조지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적어도 이 나이에라도 하고싶은 일을 찾아서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인정과 어느 정도의 칭찬이 있어야 내가 덜 쪽팔릴 것 같았다.
퇴사 이후 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을 읽으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쭉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가 나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른 몇몇 자기계발서들을 읽으며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더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 결국은 바뀌고 싶은 사람만 행동하는 법이니, 내가 바라고 원하는만큼 노력해야한다는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경제적 독립은 아직 좀 멀은 듯 하지만,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행동하고 나를 바꿔나가려고 노력하면서 성장하는 중이니, 나는 지금 반쯤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