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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비스커스 May 08. 2024

내가 처음 유서를 쓴 날

국민학생


유언을 쓰는 체험이 있다고 한다.

뭔가 우울하거나, 좌절하거나 하는 사람들에게 권유하는 치료과정이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걸 알려주려는 거 같다.

하지만 난 고마움이나 후회를 적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나를 생각하다, 내가 처음 유서를 쓴 날이 떠올랐다. 


정확하진 않지만, 국민학교 때인 건 분명하다.

동네엔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많았다. 

이상하게 내 눈엔 다 귀엽고 예뻤다. 

잘 보이고 싶었지만, 난 딱히 내세울게 없는 아이였다. 

집도 가난했고, 결손가정이었고, 키도 작고 얼굴도 평범했다.

그저 지금처럼, 뭔가 있는 것처럼, 아는 척 하는 재주 밖에 없었다. 

(그 오랜 버릇이 수십년을 이어온다는 게 놀랍다)


이상하게 그 재주가 어느 정도 먹혔다. 

나를 막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배척하고 싫어하는 정도도 아니었다. 

여자애들은 나에게 이상한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너무 말라 '멸치' 라고도 하고, 잘 생각나지는 않는데 암튼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집엔 자동차를 가진 친척들이 매주 방문했다. 

그 시절엔 내가 사는 동네에 차 한대 보기 어려웠다. 강북 깡촌의 워낙 가난한 동네이기도 하고. 

거기다 삼촌 한 명은 운전기사가 있기도 했다. 

한마디로 사회적으로 한 가닥하는 사람들이었다. 대기업 임원, 고위공직자 등등. s대 의대출신도 있었다.

물론 지금도 차곡차곡 땅 투기를 해서 잘 산다.

두 세대가 집 앞에 주차해 있으면, 여간 폼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랬나? 나 자신은 볼품이 없었기에 별 추측을 다 해본다.

쓰고보니, 아닌 거 같다. 여자애들은 순수하게 날 좋아했다. 

난 여자애들을 한 번도 귀찮게 한 적도, 괴롭힌 적이 없었다. 


어느 날인가, 구멍가게 앞에서 여자애와 단 둘이 있게 된 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 순간이 너무 좋았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애는 비눗방울을 불고 있었다. 

난 배드민턴 채를 가지고 있었고, 

여자애가 비눗방울을 불면, 난 멋지게 배드민턴 채를 휘둘러 터뜨렸다.

난 정말 그 아이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남성다운 매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마치 프로야구 선수라도 된 마냥. 

몇 번 그렇게 멋진 장면을 연출했는데, 정말 큰 방울이 만들어 졌다. 

난 옳다구나하고 풀 스위을 했다. 와장창!

내 채가 커다란 전면 유리창을 깨뜨렸다. 

여자애는 너무 놀랐던 거 같다. 

나도 놀랐다. 

솔직히 그 다음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난 집에 돌아와, 내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가진 제일 예쁜 메모지를 꺼냈다. 

여러 장 있었는데, 손바닥만한 크기에 파란색 줄이 그어진, 오른 쪽 하단에 기린이 그려진 종이였다. 

난 천천히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죄송하고, 죽음으로 사죄한다는 글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몇 장을 썼다 지웠다 했다. 

죽는다 생각하니, 얼마나 울었는 지 모른다. 

그리고 잤는지, 엄마를 맞았는지 모르겠다. 


저녁이 되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가 가게주인에게 돈을 준 거 같았다. 유리값 배상을 한 것이다.

난 혼도 나지 않았다. 

난 엄마에게, 형제들에게 유서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 유서를 어떻게 했는 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만한 일로, 난 유서까지 썼을까 이다.

이제 생각하니, 내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난 평생, 그렇게 살았던 거 같다.

말썽을 피우면 안 되고, 위험한 일을 해서도 안 되고,

모가 나서도 안 되고, 까불어도 안 된다. 

변명이지만, 난 공부를 잘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눈에 띄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5학년때 친구들의 작당으로 부반장을 한 적이 있는데, 선생의 노골적인 악의적 시선을 경험한 적 있다. 엄마는 학교에 돈을 갖다 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안 갖다 줬다는 것도 아니다. 

이런 태도를 누구도 나에게 강요한 적은 없었다. 직접적으로...

다만 난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국민학생이었지만. 


지금도 난 작은 실수에 가슴이 뛴다. 

지금도 난 겁에 질려 있고

지금도 난 불안하다. 

지금도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지금도 난 그 시절 유서를 쓰던 어린아이다. 


작가가 된 건, 유서를 쓰듯, 내가 할 수 있는, 

고통을 드러내는 가장 소극적인 행동의 일환이었던 거 같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난 이 껍질을 깨지 못할 것이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매일 유서를 쓰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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