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5일
식목일이 휴일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날은 괜히 아침부터 마음이 느슨해지던 날이었다. 나무를 심는다는 명분보다, 하루를 온전히 비워두어도 괜찮다는 허락 같은 것이 더 크게 다가왔던 기억이다. 삽을 들고 흙을 뒤집던 장면보다는, 늦잠을 자고도 어딘가 당당했던 기분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나는 애초에 ‘심는 사람’보다는 ‘기다리는 사람’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 식목일이 어느새 빨간 날에서 조용히 밀려나 보통날과 다름없이 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그 날짜를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런데 올해는 이상하게도, 식목일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포항 여행과 벚꽃 때문이었을 것이다.
2박 3일의 포항 일정동안 벚꽃을 즐길 시간은 만들 수 없었지만 잠시나마 짬을 내어 포항제철이 보이는 영일대 해수욕장에 나가보았다. 아직 바닷가를 만끽하기엔 바람도 차고 구름도 많은 날씨였지만 비 그친 후 파란 하늘과 짬짬이 내려쬐는 햇살이 고마운 풍경을 선물해 주었다. 화산 같은 연기를 내뿜던 건너편 포항제철은 밤에는 조명이 밝혀져 더욱 멋진 모습이라고 하는데 아쉽게 해 질 녘까지 기다리지를 못했다.
올해 벚꽃은 유난히 서둘러 피었다. 겨울의 끝자락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거리를 가득 채워버렸다. 준비도 마음가짐도 없이 맞이한 꽃은 더 화려하게 느껴지기도, 동시에 더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빨라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계절의 순서를 살짝 앞질러버린 느낌이었다가 엊그제 내린 비로 우수수 떨어져 버렸다.
포항에서 올라오는 길, 차 안에서 길가에 핀 벚꽃을 보며 아쉬운 대로 꽃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짧은 밤 벚꽃 놀이 흉내도 낼 수 있었다. 내리기 시작한 비가 그나마 가지에 매달려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던 꽃들에게 가혹한 마지막을 서둘러 맞이하도록 하고 있다. 식목일인 오늘, 나무 심는 날 내리는 비는 반가운 손님이겠지만 벚꽃이 한창일 때 오는 비는 언제나 피어 있는 꽃을 단번에 정리해 버리는 것 같아 반갑기보다는 야속하게 느껴진다. 비에 떨어져 버린 꽃잎을 보고 있으면, 아름다움이란 결국 오래 지속되는 것보다 얼마나 정확한 타이밍에 존재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닥에 내려앉은 꽃잎들은 얼마 전까지는 아름다웠던 ‘흔적’에 가깝다. 하지만 그 흔적이 있어야 우리는 분명히 기억한다. 아, 저 나무가 그렇게 환하게 피어 있었지. 잠깐이었지만 충분히 봤고, 그래서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된다. 어쩌면 매년 반복되는 이 장면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처음처럼 아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포항여행에서 올라와서 나의 흔적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금 나의 모습은 비에 떨어진 꽃잎같이 예전 나의 화려했던 경력과 아름다웠던 경험을 보여주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흔적에서 지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뚜렷한 자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남은 시간들을 사용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