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2일
(여행일정으로 연재를 또 하루 건너뛰고...ㅠㅠ)
브런치 연재를 건너뛰게 한 평창 여행길에 4월 7일 오픈한 뮤지엄 산의 이베 잔시를 안 보고 지나칠 수 없었다. 요즘 가장 핫한 한국 작가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술관의 만남이라니... 우고 론디로네, 안토니 곰리보다 더 기대가 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숯 조형물인 ‘Issu du feu’ 시리즈와 2020년대에 새롭게 시작한 ‘brushstroke’ 시리즈가 함께 구성되었다.
두 시리즈는 분명 같은 작가의 작업이지만, 감각적으로는 꽤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불로부터'라고 해석할 수 있는 Issu du feu는 숯덩어리 자체를 작품으로 연출하는 시리즈로 본관 입구부터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뮤지엄 산의 소개에 따르면 이배에게 있어서 숯은 생성과 소멸, 생명의 순환을 의미하는데,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숯가루의 질감이 단순한 검정이 아닌 깊은 흑색을 드러낸다. 2023년에는 미국 뉴욕 록펠러 센터 앞에 6.5m 규모의 대형 숯 조각이 설치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자연 속에 놓인 거대한 숯의 조형이었다. 하늘이 크게 열려 있고, 산의 능선이 길게 이어지는 풍경 한가운데에서, 검게 타버린 듯한 형태가 수직으로, 또 수평으로 뻗어 있었다. 그 질감은 분명 숯을 닮아 있었고, 실제로는 단단한 조형물이었지만,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불안정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압도감은 단순히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연과 어울리면서도, 동시에 그 풍경을 낯설게 만드는 힘. 마치 어떤 사건의 흔적이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처럼, 그 조형은 공간 자체를 바꾸고 있었다.
반면 ‘brushstroke’ 시리즈는 훨씬 정제되어 있었다. 붓질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언어처럼 읽혔다. 한국형 모노크롬 회화를 구현해 낸 화면은 안정되어 있고, 감정은 다소 절제되어 있으며, 작가의 의도가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뮤지엄의 설명에서 Brushstroke 시리즈는 숯가루를 정교하게 압착하여 몸의 움직임과 시간의 흔적을 붓질로 표현한 작품으로 붓질은 소멸과 흔적, 삶과 죽음, 기억과 침묵과 같은 철학적이고도 깊은 사유를 발견해 가는 매개체로 작동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하면, 예전에 파리의 선배 집에서 봤던 선이 굵은 회화 작품이 더 좋았다. 붓자국이 없이 굵은 선 하나로 화면을 채운 작품들이었는데 요즘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무겁고 단순한 대신, 더 직접적이었다. 선이 두꺼울수록 더 분명한 감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설명되지 않은 힘이 있었고, 해석하기 전에 먼저 체감되는 무게가 있었다. 그 작품을 선배가 잠옷걸이로 쓰고 있었다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인데 그 사진을 찍어둘 것을 후회가 된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계속되는데 가을 단품과 겨울 눈 속의 숯덩이들을 보러 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