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부순 고정관념
스페인 여행 중 투우장이 유명한 지역에 갔다가 투우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침통했었다. 이전부터 이어오던 전통적인 경기는 맞지만 투우 경기 자체가 존재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투우 경기가 시작되고 사람과 소가 싸운다. 경기의 끝은 피다. 참여한 소가 죽든, 사람이 죽든 어떠한 존재는 죽어야지 끝이나는 게임이다. 알고 이 책을 보니 뒝벌이 너무 얄밉기까지 했다. 페르디난드가 안타까워서. 목장에 있는 소들이 안타까워서. 죽음이라는 생명권을 담보로 한 게임은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 책에서 소들은 투우 경기를 하고자 뿔을 치고 박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소들이 투우 경기에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사람 중심의 사고이다. 인본주의. 소들은 그저 본능적으로 행동했을 수 있고 그만의 다른 의도나 차이를 가진 행동을 했을 수도 있다. 소의 입장을 상상하고 그려낼 수는 있지만 반박하고 싶었다.
며칠 전 수업시간에 읽은 글 중 떠오른 구절이 있다.
‘말썽부리는 이라는 용어는 보통 논쟁이 필요치 않으며 자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때 내가 관찰한 것은 프로그램과 교사들이 마르시에게 말썽을 부리는 것이었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내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마르시의 행동은 자신의 ’배움~삶‘을 위한 일종의 욕망 표현이었다. 즉 마르시는 삶에 대한 배움과 배움의 체험을 원하지만 교실에서 요구되는 하루일과의 규범 속에서 그 욕망들은 좌절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림책 속에서 페르디난드는 다른 소들과 다르게 그저 풀 향기 맡는 것을 좋아한다.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하는거다. 다른 소들이 설치고 있을 때도. 뒝벌 때문에 투우 경기에 갈만큼의 힘을 보여주어 이상한 모자를 쓴 그들에게 선택받았지만, 혹시나 목장이 투우 경기에 내보내는 소들을 길러내는 목장이었다면 투우 경기 준비를 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가만히 조용히 하는 페르디난드는 사람들 사이에 특정한 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반대로 가만히 있지 않고 일어나서 너무나도 돌아다닌다거나 엄청난 활동성을 보여주는 아이들을 ‘말썽꾸러기’ 또는 더 심하게 ‘문제아’ 라고 부르며 문제라는 부정적인 단어를 쓴다. 경력이 한두해가 지나면 첫 만남에서도 어떤 행동을 보고 ‘문제아’ 라는 꼬리표를 달아버리기도 한다. 꼬리표가 붙여지고 나면 그 전에 모두를 바라보던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온갖 행동 하나 하나가 다 걸리기 시작한다. ‘어쩐지’, ‘그렇더니’, ‘그럴 줄 알았다’ 축적되어 온 데이터 속에서 찍었던 도장을 또 찍고 또 찍는다. 현장에서 나 또한 그런 적이 있고 그런 모습을 본 적도 있지만, 이제 교사의 경험과 경력을 비워야 하는 때가 왔다. 학교폭력 하는 일진 아이를 따라간 논문이 있다. 논문을 읽다보면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그렇지’ 가 아니라 아이를 이해하게 되고 같이 눈물 흘리게 된다. 아무것도 없는 쌩자의 눈으로 ‘왜 그런 행동을 할까, 어떤 표현일까’ 바라보고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의 ‘배움~삶’을 위한 욕망 표현일 수 있다는 걸 염두해야 한다. 교사인 나를 돌아보고 환경을 돌아보고 맥락을 돌아봐야 한다. 문제라면 교사는 이 아이만 보는게 아니고 여러 명의 아이들과 혼자서 함께 하고 행정 업무라는 일도 있기에 한 아이에 대해 깊게 사고할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이 부족한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연구, 협의, 나눔 등은 교사만 할 것이 아니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 정책적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점을 찾는 대안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럼 대안책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기만 해도 될까? 그럼 아이들이 없을지도 모른다. 교육을 하는 사람, 내가 교육자라는 사명 아래에 아이를 바라볼 수 있는 내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