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못한 이유

버리지 못한 이유

by 지니샘

오랜만에 세탁기에 들어갔다. 다른 이에게 나를 잘도 넘겨주더니 바로 씻겨 버리는 게 아닌가! 약간의 억울하다. 내가 너에게서 떨어지고 싶다고 했냐고. 자기가 줘놓고서는. 시원한 물을 맞으며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 휭휭 들을 때마다 적응되지 않는 회전을 겪으며 내 살이 찢어지건 말건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모르겠다. 나는.


너는 나를 참 좋아했다. 우리가 언제 만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지금보다 앳된 얼굴을 가진 네가 시원한 여름을 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너의 엄마는 나를 선물했다. 가게에 누워 새로운 이를 기다리던 설렘 속의 내가 방문한 첫 번째 집이다. 제 등만 한 가방을 매고 다니던 너는 처음에 시큰둥했다. “캐릭터가 귀여운데 못생겼어” 너의 말을 듣지 않을 걸 그랬다. 귀를 잠시 막을걸. 열린 귀에 나 스스로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그래도 너는 잘만 나를 찾았다. 딱 처음 덮은 날은 보았을 때와 다르게 “엄마! 이거 너무 좋아! 착 감겨!” 이야기하기도 했다. 귀 기울이게 하는 너의 말은 나를 행동하게 했다. 입을 벌리고 얌전히 잠을 자는 너를 감싸 안으면 그게 좋다는 듯 너는 나에게 더 파고들었다. 너의 편안함이 나의 성취로, 평안으로 다가와 이 집, 너의 방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을 가지게 했다. 언제라도 여기에 있고 싶었다. 여름이 올 때쯤만 되면 나를 찾았다. 사실 너는 겨울에도 나를 덮고 싶은 듯했지만, ”계절을 알자 계절을, 추위도 많이 타면서” 그럴 때면 엄마는 나를 접어 갈색 장롱 안에 넣었다. 지금 있는 새로운 집으로 왔을 때 나를 꼭 안는 너의 손을 느꼈다. 너만큼이나 나도 꼭 붙들려 우리가 함께 있음을 더욱 실감했다. 가면 갈수록 서랍에서 나오는 시기는 더욱 빨라졌다. 더위가 빨리 찾아온 듯 나는 내 할 일을, 너는 이렇든 저렇든 잘 잤다. 너의 위에 올려진 모든 시간을 기억하는 나와 함께 말이다.


건조기 안에서 나는 덜 말랐다. 한참을 돌아가고 또 돌아갔는데도 끝나지 않는다. 나조차 지쳐갈 즘 너는 나를 꺼냈다. 거실에 펼쳐두고 낑낑 제습기를 들고 와 곁에서 말렸다. 그러다가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나만 건조기에 다시 넣었다. 구워삶아져 보송해진 내가 “이제 그만” 기계에게 외치고 싶을 때쯤 너를 만났다. 너의 손을. 끝을 잡고 호익 던져진 나를 보며 “어머!” 생각하고 말한 것 같지는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팍이 찢어져 하얀 솜이 다 내보였다. 난 좀 긴장했다.


아직 나는 너를 버릴 수가 없다. 별 것 아닌 추위에도 나를 움켜쥐는 너를 데워주고 싶고, 너의 체온 위에서 얽히고 싶다. 접혀있는 동안은 내 위에 있는 두딘이에게 인사도 못했고 환경을 다 떠나 네가 아직 좋다. 아직 너를 떠나기엔 마음이 멀었다. 날 좋아하는 너의 마음은 알지만 바느질 도구 하나 없는 네가 뭐랄지 몰라 외치고 또 외쳤다. 들릴지는 모르지만. 나는 아직 너를 버릴 수 없다.


상처를 못 본 체 나를 개어 서랍 속에 넣는 너. 내가 나를, 내가 너를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너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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