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화된 기억
동글해진 기억을 매만진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안 그래도 그렇게까지 뾰족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공을 만지는 것만 같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가면 갈수록 사이 사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았지만 다르게 뻗어나간 관계 속에서 이또한 달라진다. 미지근한 온도를 가진 한 아이가 서 있다. 인스타 스토리에서나 볼 수 있는 그녀는 이제 나에게 추억이 되어버렸다. 매 순간 서로를 나누던 때가 있었던 그녀 말이다.
20살 아니 21살인가. 술집에서 소맥으로 어색한 회포를 짠 소리로 날려버렸다. 역시 학창시절 싸움은 커서 마시는 술 한 잔으로 잊을 수 있구나를 느끼던 어린 날이었다. 현재로 돌아와 보면 술 한 잔에 잊혀진 건 과거의 감정과 우리의 빛바랜 우정이었다. 빛이 너무 바래버려서 다시 색깔이 돌아오기는 힘든. 깔깔 웃으며 한동안 보지 않았어도, 그러고 대학교를 가서 새로운 세상을 마주했음에도 우리는 이전과 같이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오직 그 하루였지만 말이다. 안녕 다음에 또 만나자, 연락해! 하는 소리와 함께 멀어지던 그녀를 나는 기분 좋게 보냈다. 당시에는 내일이라도 진짜로 또 만나고 싶었으나 그 생각에도 먼지가 쌓일 수 있음을 몰랐다.
우리는 12년을 같은 학교에 있었다. 6년은 거의 모르는 사이로, 5년은 없으면 안되는 단짝으로, 1년은 남보다 못한 존재로 말이다. 중학교에 들어온 3년간 부피찬 기억을 한아름 채웠다. 매일 만나고 매일 공유하고 매일 나누고 매일 주워드는 시간이었다. 서로를 찍고 찍히고 우리 둘 사이는 모르는게 없었다. 쌍둥이 보다는 언니와 동생 같아 주변 친구들은 ”걔는 어딨어?“ 하고 묻기 다반사였다. 고등학교에 들어와 다른 반이 되고 균열이 생겼다. 점심시간마다 우리는 밥을 먹으러 같이 갔는데 각자의 반에 새로운 밥 친구들이 생긴 것이다. “그게 뭐 서운하지는 않다” 둘 다 사정을 이해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중학교와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 갔지만 분명 작은 스파크가 튀고 갈라짐이 있었다. 새로운 관계들을 맺으며 그 틈을 메웠다. 우리 주변을 형성한 보지 못한 관계들이 속속들이 생겨났다. 그러한 얽힘 속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가장 기억해내고 싶어 글을 시작한 장면은 유효기한이 끝났다는 듯 그려지지 않는다. 내 생일에 “우리 이제 친구 못하겠다.” 서프라이즈! 하면서 환하게 웃을 것만 같은 멘트와 함께 생일에 버림받은 나, 생일에 터뜨린 너는 얽힘의 실을 잘랐다. 다시 붙이기 굉장히 어려울거란 걸 아마 둘 다 알았을 것이다. 그 후로는 째림과 무관심, 서로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주변을 비난하는 소리들만 들려왔다. 이제 기억하지 않으련다.
달콤한 초콜릿 중에서도 첫 맛과 다르게 뒤가 씁쓸한 것들이 있다. 이것과 같지 않을까. 하지만 씁쓸함도 곧 형체를, 감각의 주체를 넘기고 만다. 입 안에 남은, 혀에 묻은 갈색 조각도 녹아 내려가 버리고 만다. 미지근하고 동그르스르만 기억을 넘기다 어느새 무뎌진 나를 발견하고는 웃는다. 이제는 넘길 수 있겠다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