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몇 번씩 아빠의 빈자리가 느껴진다.

문뜩 올라오는 감정에 대하여

by 김정은 변호사

삶이 유한하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나의 삶이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별로 와닿지 않았다. 죽음과 슬픔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며 40여 년을 살아왔다. 그러던 중 할머니의 죽음, 반려견의 죽음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 순간에 숨이 끊기고 차가운 시체로, 딱딱한 몸체로 굳어지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하니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처럼 느껴졌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죽음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야말로 나의 세계가 무너진 것 같았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부모는 자식의 세계이고, 전부이며, 우주라고 말이다. 정말 부모의 죽음은 나의 세계가 흔들리는 충격을 주었다. 죽음, 슬픔은 나의 인생과 무관하다 여기며 욕심 한가득 부리며 살아왔던 나이다. 별 것도 아닌 것에 감정 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존심이 밥 먹여준다고 여기며 성질을 한껏 부리며 살아왔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나의 이런 사고를 정지시켰다. 나의 삶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였다. 근본적으로 나는 왜 삶을 사는 것인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학교 때만 하더라도 아니 학창 시절의 나는 그렇게 삶에 욕심부리거나 성공에 목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옷이나 가방 같은 소지품에 욕심부리며 동생이라 다투기는 했어도 굳이 전전긍긍하며 성적에 목매지는 않았던 것 같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조금 신경 썼을 뿐 성적이 좋지 않다고 낙담하거나 우울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성적과는 무관하게 막연히 나의 삶은 장밋빛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나의 노력이 성과로 비치면서 나는 나의 삶에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면서 삶을 즐기기보다는 자꾸 더 높은 성과를 내고자 하기만 했던 것 같다. 목표한 바를 이루기도 했지만 이를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목표 설정을 끝없이 하곤 했다. 그렇게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아빠의 맥없는 죽음을 겪고 나니 나를 더 사랑하고 내 삶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자고 다짐하게 된다. 외형에 내 에너지, 노력을 투영할 만큼 삶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명제를 나의 피부로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 커피 한잔의 여유, 가족들과의 대화 시간, 눈 맞춤에 더 큰 가치를 두고자 한다.


아빠의 부재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텅 빈 아빠 방을 물끄러미 보곤 한다. 언제고 아빠가 '정은아 왔니'라며 말을 걸 것만 같다. 몇십 년의 시간이 지나도 아빠의 부재가 믿기지 않을 것 같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 지금도 마치 아빠가 옆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지낸다. 그렇게 나는 아빠를 떠내 보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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