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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11월 어느 토요일, 인천공항

위기 상황에서 행동을 결정하는 능력

by 하랑

다른 출국장의 줄이 짧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토요일이었다. 대부분 사람에게 주말은 여유를 찾는 순간이지만, 나에게는 예외였다. 오전 9시에 출근하여 임원과 미팅을 시작하여 점심도 함께 먹고 오후 3시까지 추가 미팅을 마치고서야 퇴근을 할 수 있었다. 그때 머릿속엔 단 하나의 목표만 남아 있었다.


“오후 3시 35분 공항철도를 타야 한다.”


서울역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유난히 빨랐다. 기차 안에서 항공사 모바일 체크인을 끝내고, 인천공항에서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머릿속으로 동선을 그렸다.


이날 비행기는 오후 6시 5분 후쿠오카행, 목적지까지 가려면 한 치의 여유도 없었다.

인천공항 도착 예정 시각은 4시 16분. 말 그대로 1분 1초가 중요했다.

보통 이렇게 촉박하게 공항에 도착하지 않는데, 이번에는 회사일 및 여러 가지 정황으로 어쩔 수 없었다.

돌발 변수가 생길 수도 있으므로 공항에는 최소 2시간 전에 와야 하는데 이번은 너무 아슬아슬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 틈을 지나 3층 출국장으로 거의 100m 달리기하듯이 뛰었다.

숨은 차오르는데 그 순간 임원에게서 받은 숙제가 떠올랐다. 애써 머릿속의 생각을 비우고 후쿠오카에 미리 가 있는 가족들 생각만 했다.


셀프 체크인 무인 단말기에서 티켓을 손에 쥐었을 때는 오후 4시 35분.

시간에 쫓기다 보니 여행의 설렘보다는 임무를 완수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올해만 다섯 번째 출국인데도, 경험이 그 긴박함을 완전히 없애주진 못했다.


티켓과 여권을 한 손에 쥐고 출국장으로 뛰어가 줄을 섰다.
그때, 내 앞에 서 있던 한 외국인 여성이 다급히 물었다.
“이 줄, 출국장 맞죠?”


아무래도 줄이 전혀 줄어들지 않으니, 출국장이 맞는지 재차 확인하는 것 같았다. 걱정이 많이 되었는지 그녀의 얼굴은 어둡고 지쳐 보였다. 출국장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처럼 그대로 멈춰 있었다. 인천공항이 이렇게 느릴 리가 없는데…. 순간 낯선 정적이 공기를 채웠다.


출국장 줄이 맞다고 말해주면서 그녀의 티켓을 보니 샌프란시스코행. 보딩 타임은 5시 10분.

아! 시간이 너무 없다. 그녀는 30분 만에 게이트 앞에 가 있어야 한다.

그녀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녀를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계산된 판단이 아니었다. 단지 그 순간, 누군가의 불안이 나의 불안보다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나도 촉박했지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아직 내게 여유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달팽이가 움직이듯 줄이 아주 천천히 줄어들었다. 다른 출국장도 이와 비슷한 상황 일지 아닐지 알 수 없으니 지금 이 줄에서 이탈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 혼자 였다면 이것 저것 알아보느라 이리 저리 움직여 보았을텐데... 이 여성분이 마음에 걸렸다. 홀로 남겨 놓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나랑 함께 다른 출국장으로 이동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리스크가 있었다. 다른 출국장 줄이 짧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오고갔다. 그럼에도 결정해야 했다. 이 줄에 계속 서 있을지, 다른 출국장으로 가볼지 말이다.


눈에서 광선을 쏘며 공항 직원이 지나가는지 주변을 살펴보았다. 몇 분 후 저 멀리서 지나가는 공항 직원을 발견했다. 팔을 들어 손짓도 하면서 다급히 불렀다.


“이분 탑승 시간이 5시 10분인데, 줄이 전혀 움직이지 않아요.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직원은 그녀의 상기된 표정과 탑승티켓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이쪽은 공사 때문에 지연되고 있어요. 4번 출국장으로 가시면 훨씬 빠릅니다.”

( 안내판이라도 세워서 공사중인 상황을 알리고 다른 출국장을 이용하라는 안내를 좀 해주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녀에게 통역을 해주자마자 우리는 눈빛으로 의사를 교환하고 거의 동시에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캐리어와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무거운 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표정은 아까보다는 훨씬 밝아졌다. 나 역시 뛰면서 그녀를 챙겼다.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미소를 보냈다. 숨이 차올랐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맑아졌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낯선 공항에 있었지만,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는 단순한 공감이 묘하게 힘을 주었다.


4번 출국장은 놀라울 만큼 한산했고, 출국 심사도 금세 끝났다. 그녀는 숨을 골라가며 말했다.
“도심에서 공항까지 오는데 교통 체증 때문에 두 시간이 넘게 걸렸어요.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이제 안심이 되네요. 어디로 가시나요?”

“일본 후쿠오카요.”
그녀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Oh! Nice Japan”


그 순간 깨달았다. 그녀에게 내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낯선 시간 속에서 잠시나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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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행 게이트 앞 의자에 앉으니 오후 5시가 넘었다.

그녀도 비슷한 시간에 샌프란시스코행 게이트에 잘 도착했을 것이다.

아드레날린이 빠지기 시작하자 긴장이 풀리고 안도감이 밀려왔다.


“4시 16분에 공항철도에서 내려 40분 만에 게이트라니… 정말 가능한 일인가?”


부칠 짐이 없었다는 게 가장 주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모바일 체크인을 통해 시간을 단축했고 인천공항의 출국 시스템도 역할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수많은 출장과 여행을 거치며 몸에 밴 질문하는 습관과 빠른 판단력이었다.


스탠포드 경영대학원 연구에 따르면, 경험에서 나온 직관적 판단은 복잡한 상황일수록 정확도가 높다고 한다. 매일 경험을 쌓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공항이라는 혼돈 속에서도 내가 크게 당황하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결국 업무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길러진 리더십의 습관들이 작동한 것 같다.



하버드의 로버트 케이건 교수는 “성장이란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복잡성을 다루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했다.


오늘 내가 다룬 복잡성은 단순히 촉박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타인을 먼저 바라보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선택이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오늘 나는 무리한 일정 속에서도 작은 배려 하나를 실천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 이 단순한 행동이야말로 리더십의 시작이다.

리더십은 결국 ‘순간의 행동’으로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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