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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평가, 팀장의 빛과 그림자

내가 보는 나, 타인이 보는 나

by 하랑

회사가 1년에 한 번 보내오는 가장 긴장되는 이메일이 있다. 바로 다면평가(360도 피드백) 결과 통지 메일이다. 팀장으로서 업무 보고보다 더 열어보기 어려운 문서가 있다면 바로 이 평가표일 것이다. 올해는 특히 팀장 역할이 유난히 무겁게만 느껴졌기에, 결과가 기대보다 낮다면 나를 더 깊은 구덩이로 떨어뜨릴까 두려웠다. 며칠을 망설이다가 결국 메일을 열었을 때, 예상보다 좋은 결과가 눈앞에 펼쳐졌다.


상위권. 그것도 본부 전체에서도 높은 점수. 상사·동료·부하직원 모두의 평가가 일관되게 좋았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타인이 평가한 ‘나’가 내가 생각한 ‘나’보다 훨씬 높았다는 사실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타인 지각 간극(self–other perception gap)’이라고 부르며, 이 간극이 큰 사람일수록 성찰과 변화의 잠재력이 높다고 말한다. 내가 보는 나도 나지만, 타인이 바라본 나 또한 ‘나’라는 것을 그 순간 새삼 실감했다.


그러나 이 평가표에는 칭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림자도 있었다. 두 해 연속 낮은 점수를 받은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틀을 깨는 시도’와 ‘실패를 통한 학습 기회 제공’이었다.

나는 스스로 효율성과 리스크 관리 능력을 리더의 덕목이라 믿어왔다. 변수를 ‘관리 가능한 것’과 ‘관리 불가능한 것’으로 나누고,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줄이는 것이 유능한 리더라 생각했다. 리스크가 실적으로 직결되는 환경에서는, 효율 중심 사고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팀의 특성상 실수는 곧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예상 가능한 실수는 원천 봉쇄하자”, “리스크는 최소화해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다.

그러나 다면평가는 내 신념의 뒷면을 드러냈다. 나는 팀원들의 실수를 예방했다고 생각했지만, 팀원들은 경험을 통해 성장할 기회가 차단되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이 성장욕구를 발휘하기 위해선 안전 욕구가 먼저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안전’을 제공한다고 실수의 여지를 없앴지만, 그 과정에서 팀원들이 스스로 시도하고 부딪히며 배우는 성장 단계(challenge phase)로 넘어갈 욕구를 빼앗고 있었던 것 같다.


강한 통제는 결국 구성원을 리더의 프레임 안에서만 움직이게 하고, 새로운 시도 자체를 떠올리지 못하게 만든다. 효율만 좇은 나의 리더십은 장기적으로 팀원의 성장 속도를 늦췄는지도 모른다.


다면평가를 본 이후, 내 마음속에서 명확한 문장이 떠올랐다.
“단기 효율의 달콤함을 내려놓고, 장기 성장을 위한 계획된 불안정성을 받아들이자.”


성장하는 조직은 실패가 없어서 강한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실패할 수 있는 구조가 있어서 강하다. <두려움 없는 조직; The Fearless Organization>의 저자 에이미 에드먼슨(Amy Edmondson)도 책에서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을 자주 언급했다. 구성원이 평가나 비난의 두려움 없이 의견을 낼 수 있을 때, 혁신과 창의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실패를 용인해 주고 심리적 안전감을 제공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기에 그렇게 자주 ‘심리적 안전감’을 책에서 외치는지도 모른다. 팀장이 컨트롤(통제)을 내려놓는 일은 쉬운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다는 것은 실패해도 기다려 주는 것이다. 자녀의 성장을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든 바로 나타나서 뭐든지 해결해 주는 '헬리콥터 맘'이 좋은 대안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조직도 결국 성장하는 하나의 ‘생명체’다. 아이가 넘어지며 배우듯, 팀도 시행착오를 통해 단단해진다.


리더란 팀원들이 마음껏 성장하도록 ‘실패의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이라고 강의에서 자주 들었다. ‘좋은 말이지’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실행해 볼 생각은 안 했는데, 이제는 실행을 해봐야겠다는 건설적인 다짐이 생겼다.


이번 다면평가는 단순한 평가표가 아니었다. 내가 보지 못했던 나의 ‘그림자’를 내가 정확히 인식하고 앞으로의 리더십 방향을 새롭게 정립할 계기가 되었다. 결국 리더십이란 통제가 아니라 신뢰, 감독이 아니라 기회 제공, 완벽함이 아니라 성장의 여지를 남기는 일이다.


내년 다면평가에서 모든 항목이 높아지길 바라진 않는다. 하지만 단 하나, ‘틀을 깨는 시도’라는 항목만큼은 스스로에게도, 팀원들에게도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오늘부터 행동을 바꿔보고자 한다.


좋은 팀장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만들어지는 거라는 걸, 이번 다면평가 결과보고서를 읽으며 깨우쳤다. 리더십의 진짜 성장은, 팀원의 성장이 시작되는 그 순간에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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