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왜 우리는 사진을 찍기만 하고 다시 보지 않을까

기록해 두고 다시 들춰보지 않는 인간의 심리

by 하랑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남긴다. 여행을 가면 수십 장의 사진을 찍고, 강의를 들으면 빽빽하게 노트 필기를 한다. SNS에 올리기 위해, 혹은 나중에 다시 보기 위해 메모와 자료를 쌓아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공들여 적어둔 기록을 다시 꺼내 보는 일은 거의 없다. 사진첩에는 수천 장의 사진이 저장되지만, 실제로 다시 보는 것은 그중 몇 장뿐이다. 왜 그럴까?


기록은 소유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착시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대리 만족 효과(Documented Completion Illusion)라고 부른다. 무언가를 ‘기록했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내 마음속에서 완료감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사진을 찍는 순간 “나는 이 순간을 잡았다”는 감정이 들고, 강의 때 필기하는 순간 “오늘 내용은 충분히 배웠다”는 착각이 생긴다. 이미 마음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다시 꺼내 볼 동기가 자연스레 줄어드는 것이다.


컬럼비아대 벳시 스패로(Betsy Sparrow)의 연구는 더 흥미롭다. 사람은 정보가 어디엔가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내용을 본인의 기억에 저장하려는 노력을 덜 기울인다. 사진첩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기억은 그 장면을 적극적으로 붙잡지 않는다. 필기해 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뇌는 그 내용을 길게 저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록해 두면 더 기억날 것 같아서…”라는 우리의 기대는 실제로는 정반대로 작동한다.

사진이나 기록을 다시 보기 어려운 이유에는 정서적 요인도 있다. 과거의 사진을 다시 본다는 것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게 하는 일이다. ‘다시 본다면 변화와 마주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서적 회피(Emotional Avoidance)라고 한다. 다시 들춰보면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렀다는 사실, 내가 변했다는 사실, 지나간 장면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하랑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대기업 팀장 4년차, 겁 없이 빠른 실행력,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여팀장의 리더십,

411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11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작가의 이전글왜 상사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