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지와메밀
평일날 여유가 생겨 백화점 나들이를 했다. 이 옷 저 옷 입어보느라 신체적으로 많이 고단한 상태에서 기력 보충을 하기 위해 점심을 먹기로 했다. 지하 푸드코트는 먹어 본 봐 만족스럽지 못해서 이번에 8층 전문식당가를 가기로 했다. 여러 군데 돌아 본 결과 마땅히 끌리는 곳은 없었다. 더군다나 점심시간이 되니 인기가 많은 식당을 웨이팅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씨가 저번에 지나쳤던 그 식당 한번 가볼까요?라고 제안을 했고 난 기억이 잘 나진 않았지만 따라갔다. 9층에 딤딤섬이라는 유명한 딤섬 식당 맡은 편에 자리한 한식집이었다. 메뉴를 보니 낙지와 메밀이 주력이었고, 안에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미 체력이 방진 되어있었고 씨가 완고하게 이 집에서 먹자 카리스마를 보여주셔서 자리를 잡았다. 위치가 어린이 테마파크, 아쿠아리움 옆에 있어서 고객에 아기들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메뉴도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근심 걱정이 살짝 들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메뉴판을 보니 식당명이 광화문미진이고 부제로 낙지와메밀이라는 재료가 명확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 두 가지 재료를 기반으로 음식들이 나왔다. 짧은 고민 끝에 날씨와 컨디션을 고려해서 메밀낙지수제비정식 2인분을 시켰다. 씨는 메밀면을 먹어보고 싶어 했지만 추운 날씨에 냉수를 살짝 마시니 그 오한이 강하게 와서 도저히 살얼음 동동 떠있는 메밀 소바는 못 먹을 것 같아 정중히 거절했다.
먼저 기본찬이 나왔다. 콩나물, 백김치, 단무지 매운 요리와 어울리는 반찬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직원분이 설명해 주시길 낙지볶음에 밥을 비빌 때 콩나물과 김가루를 넣고 비벼 먹으면 맛있다고 하셨다. 단무지는 특유는 노란 식용색소가 없어 보다 건강한 느낌이 들어 좋았고 백김치는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간이 세지 않고 특정 강한 향이 나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는 소박한 반찬이었다.
낙지볶음과, 수제비, 메밀전병이 함께 나왔다. 강렬한 비주얼로 식욕을 자극하는 낙지볶음에 당연히 시선이 가장 먼저 갔다. 낚지가 어느 정도 잘려서 조리되어 나왔지만 생각보다 오동통하고 큼직해서 밥에 잘 비벼져 먹기 쉽도록 가위로 두세 번 더 잘랐다. 그러나 낚지 다리 하나는 자르지 않고 하나 온전히 놔두었다. 그 이유는 차후 낚지의 식감과 함께 설명이 될 것이다. 밥에 양념이 지나치게 들어가지 않도록 젓가락으로 하나씩 집어서 낙지볶음을 넣고 김가루와 콩나물을 넣어 야무지게 비볐다. 맛을 보니 매운맛이 다른 재료들과 잘 중화되어서 맵지 않고 적당하게 매콤하고 알싸하게 입안에서 착착 감기는 맛이었다. 불향이 나긴 하지만 자극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밥에 다 넣지 않은 양념을 싹싹 긁어먹으니 강한 매운맛이 온몸으로 퍼져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오는 양념 온전히 다 먹으면 평소 흔히 접하는 주꾸미, 낙지볶음의 매운맛과 별반 다른 점은 없었다.
큼직한 스테인리스 그릇에 메밀낙지수제비가 양껏 담겨 나왔다. 내심 보기에도 온기가 느껴지는 옹기냄비에 담겨 나오길 기대해서 다소 아쉬웠지만 적당한 속도로 국물이 식어줘 먹기 편한 장점도 있었다. 수제비의 내용물은 굉장히 단조로웠다. 이름 그대로였다. 메밀수제비와 애호박, 고추, 양파 같은 채소 그리고 낙지. 하지만 낙지를 한 점 먹는 순간 이 음식은 수준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씨가 낙지를 한 점 입에 넣고 씹자마자 눈이 땡그래지며 낙지가 이렇게 맛있었나?라고 감탄하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사실 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반응이 뜨듯미지근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집 낙지의 탱탱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은 아주 일품이었다. 낙지를 살짝 데쳐낸 듯한 식감이었는데 음식을 보면 강한 불에 재료들을 푹인 듯 조리법이 예상되어 도대체 낙지를 어떻게 조리했는지 궁금해졌다. 푹 익은 듯한 질긴 맛은 온데간데없고 갓 데친 듯 쫄깃한 맛이 씹는 족족 부서져 씹으면 씹을수록 부드럽게 잘 넘어갔다. 이러한 이유로 낙지볶음의 다리 하나를 자르지 않고 통으로 놔두었다. 씨는 여동생분을 데리고 한 번 더 와야겠다 재방문 의사를 비추며 낙지의 식감에 아주 만족하였다. 낙지가 워낙 강렬해서 메밀수제비는 상대적으로 묻혔지만 이 또한 여느 수제비와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수제비는 물컹물컹하고 겉이 미끌미끌한 느낌이 있는데 이집 수제비는 마치 면 같았다. 채 썰면 칼국수 면이 될 것 같은 식감이었다. 조직이 보다 오밀조밀 단단하였고 그래서 그런지 먹기 부담스럽지 않도록 두께가 굉장히 얇았다. 씹으면 씹을수록 그 조직들이 서로 잘려 따로 놀지 다시 뭉쳐지는 점성을 전혀 없었다. 국물은 굉장히 순수한 맛이었다. 칼국수였으면 양념간장을 넣어 먹어야 될 정도였지만 낙지 특유의 시원한 맛과 조개도 한몫 톡톡히 하여 싱겁지만 깊은 맛이 났다.
마지막으로 메밀전병은 그저 그런 맛이었다. 김치만두랄까. 매콤한 속으로 가득 차 먹으면 포만감이 확연히 느껴졌다. 기름기가 전혀 없는 것이 에어프라이기로 조리한 것 같았다. 겉의 메밀 반죽의 수분이 나라가 마른 논처럼 갈라져 있기도 했다. 기름기 없어 느끼하지 않았지만 그만큼 텁텁하고 속이 꽉 차 입안에 넣으면 입안 가득 들어차 씹어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웠다.
전국에 여러 개 있는 프랜차이즈 식당이어서 큰 기대 없이 방문했다가 낙지라는 소중한 보물을 발견하여 기분 좋은 맛집이었다. 재료의 중요성을 새삼 느낀다. 확실히 낙지 하나만큼은 훌륭한 것 같다. 씨의 낙지가 원래 이런맛이었어요? 라는 질문에 머릿속으로 답을 찾아보니 자극적인 불향의 매운 양념만 떠오르는 걸 봐서 대부분 낙지 요리 전문점이 낙지의 식감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또한 낙지를 온전히 한 번 더 즐기기 위해 재방문 의사가 있는 그러한 식당 있었다.
낙지가 낙지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