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록을 편집하며
거대한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하여 무턱대고 갈망하지 않는다. 내가 늘 원하고 바라왔던 것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평범하지 않은 꿈을 소망한지 오 년쯤 되었을까, 난 정말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삶을 수치화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사람들은 다양한 것들을 자처럼 여기고 나라는 재단에 대어 보고 어림짐작한다. 나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았던 것 같다. 대학은 어느 정도의 네임밸류가 있는 곳에 진학을 해야 되고, 봉급은 얼만 해야 적당하며 와 같은 무시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잣대로 나를 규정지었다. 난 늘 그 안에서 어푸 숨 참고 한참을 헤엄쳤던 것 같다.
바라고 원하는 삶을 되뇌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바랐더니 정말 그렇게 됐다. 지금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얼핏 상상하고 그려본다. 가끔 여력이 있을 때에는 바라는 상황을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뭔가 그 시기에는 그러고 있을 것 같다. 난 늘 바라온 대로 돼왔으니 그냥 그럴 거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에 남들을 시기하지 않는다. 남들의 멋진 부분은 그냥 순수하게 동경해버린다. 앞으로의 내가 그런 모습을 가지면 되기 때문이다. 또, 굳이 모난 마음을 정맞게 맘속에 품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약간의 침잠 같은 것들은 기준이 밖에 있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단정 짓고 싶다. 모든 것의 기준을 나에게 두고 내가 밟아온 길들, 남겨온 글들, 조작조작 내 손과 내 짱구로 만들었던 것들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나라는 명확하고도 적확한 기준이 생겼더니 더 이상 남의 기대에 어푸 헤엄치지 않아도 되었다. 띄엄띄엄 학교를 다니고, 늦되게 졸업하여, 서른이 다 된 지금 논문을 쓰며 일을 병행하는 애쓰는 내가 세상을 밟아가는 이 길이 누군가에게는 늦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이 소모적일 시간들이 나에게는 발품을 열심히 팔며 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한 발재간이다. 물 위의 백조는 물밑에서 발전기처럼 발을 구르고 있다.
우리 갤러리는 매번 도록을 제작하지는 않고, 대체로 모바일 도록을 제작한다. 왁구를 짜둔 파일 위에 저화질의 작품 사진을 대체해 새로이 받은 고화질 사진을 올렸다. 작품 사진도 쪼그맣고 파일의 미리 보기 사진도 짜그매서 사진을 수정하는 것에 처음엔 애를 많이 먹었다. 근데 그냥 하는 것이다. 나의 커다랗고 빠른 눈동자는 작품의 차이점을 금방 캐치하고 사진을 바꿔친다. 찰나 공장처럼 그냥 하다 보면 다 완성이 되어있다.
사진 파일을 다 수정하고 마지막 클릭, 모바일 도록 파일을 다 만든 순간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그냥 살아가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 모바일도록을 다 만들겠다는 일념이 있으면 그냥 하면 된다. 맥락이 맞는진 모르겠다만 순간 일맥상통하여 보였다. 일상 속에서 의미를 극대화하여 깨닫는 일은 무척 재밌고, 또 반가운 일이다.
난 많이 슬펐으니, 행복할 자격이 된다. 그런 자격을 셀프로 나에게 주기로 했다. 어차피 인생은 DIY다. 울다 지쳐 잠에 들고, 자고 일어나면 반복되는 눈물들을 하도 흘려서 이제 몸에 눈물이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대신 웃기로 했다. 뭐라더라, 엄마가 보내준 url에는 세상이 네게 나쁜 것을 주어도 웃어라 같은 서양철학자의 철학적인 실천적 주문, 명령 같은 문구가 담겨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마음이 이미 충만하여, 그런 것 보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다. 오만한 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