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없다는 상상

다정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

by 느린날들

오늘은 긴치마를 입고 출근하였다. 오월 날씨가 오월 날씨 같지가 않다. 여름에는 얼마나 더울까 생각만 하면 아찔하다. 출근한 후 30분간은 나의 시간이다. 글을 쓰는 일이 근래에 들어 잦아졌다. 논문을 쓰기도 하고, 일기나 블로그에 짬짬이 무언가라도 기록을 남겨놓는 습관이 들었다. 다 유 씨를 만나고 생긴 버릇들이었다.


유 씨를 만나고 무엇이 변했을까 문득 생각해 보았다. 유 씨를 만나고 단조로웠던 나의 삶은 다채로워졌다. 넘쳐나는 글들과 기쁜 감정들 안정된 기분들 오버를 조금 더 해서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는 은연중의 생각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오후에는 오랜만에 유 씨를 만난다. 생활 반경이 멀다 보니 퇴근하고 간단하게 술 한잔하기는 어렵지만, 주말을 이용해 막간의 오프인 주중도 가끔 더해서 날을 잡고 만난다. 근 한 달여간의 주말 일정이 꽉 찼다. 우리는 어쩌면 같은 마음으로 재회하는 순간들을 기다리는 것만 같다.


무언가를 쓰는 일은 나에게 있어서 쉬는 시간이나 다를 바 없다. 피부가 한동안 계절성인지 알레르기 때문인지 뭐가 오돌도돌 올라왔었다. 기존에 잘 봐주시던 피부과 원장님은 종종 자기는 파이어족이 꿈이라면서 일본의 시골마을에 가서 한적하게 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일본어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는다고 하소연하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환자가 생각한 질환이라고? 어디서 주워들었던 것 같다. 얼굴에 뭐가 올라와서 피부과에 갔더니 그 사람 대신해서 자리에 앉은 앳돼 보이는 의사 선생님은 평생 나본 적 없는 여드름 약을 한 움큼 될만치 처방해 주셨다. 두 달에 걸쳐 재방문해도 차도가 없었다. 피부가 점점 두꺼워지는 요상한 기분이 들었다.


세 번째 달에 재방문하였을 때 알레르기 때문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다. 의사는 그럴 리가 없다는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한 채로 알레르기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약을 먹은 지 하루, 피부가 고새 가라앉았다. 어쩌면 내가 맞았을까? 그리고 그 사람은 어디에서인가 잘 살고 있을까, 사람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는 일들을 하며 살아갈까 그런 무상한 것들을 가끔씩 생각한다.


계절통을 겪는 것인지 꽃가루 때문인지 피부에 뭐가 많이 올라왔다. 아득했던 겨울을 보내고 다가오는 봄이 금방일 여름이 기대되고 기다려진다. 함께할 몇 번의 계절들 우리가 약속한 시간들 그 사이의 감흥들을 상상해 본다. 우려하고 사서 하는 걱정들은 유 씨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새하얗게 바래진다.


규모가 큰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일상의 자그마한 순간들이 모여 매일을 구성한다. 어제의 내가 나아진 오늘이 되는 것에 비료가 되어준다. 기준은 나로 두고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사소한 것들로 움직인다. 뭐든지 과정이 모여 결과가 되는 법이니까 일상이 솔찬히 행복해야 한다. 소탈하니 무탈한 것이 제일이다 생각하는 것이다.


살이 좀 찐 것 같다. 마음이 넉넉해져서 그런 것 같다. 까칠한 아가씨일 때에는 43킬로까지 빠졌었는데 근래에는 키로수를 잴 일이 없어서 얼마나 쪘는지 까지는 모르겠다.


유 씨는 다정하다. 사려 깊고 눈치가 빠르며 재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멋있다. 멋진 사람이다. 재회할 때마다 마주치는 첫 눈빛이 간지러운 사람이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 마음에 그릇이 있다면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자꾸만 차고 넘쳐흐르는 사람이다. 내가 주체를 못 하게 좋아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할 일이 다시 있을까 의문도 들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궁금한 사람이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좋다고 한참을 말해도.. 더 말하고 싶은 사람이다.


어떨 때에는 그런 생각을 한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더 큰 것인지 사랑한다는 감정이 더 큰 것인지 모르겠지만 결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두 감정이 번갈아가며 혹은 동시에 어떨 땐 둘 중에 하나가 압도되어 유 씨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에서 우러난다. 신기한 것이다. 아득해지는 지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내 마음의 위치를 다시금 짚어보지만 여전히 신기하게도 이 사람이 무턱대고 좋다.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우리의 모습도 사랑하지만 가끔은 똑 떼어내어 둘만 있는 것을 상상한다. 실제로도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둘만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나의 온 신경은 유 씨를 향해있고 유 씨 또한 그렇다. 피로한 몸을 이끌고 좋아서 보고 또 서로를 본다. 무탈하니 매일을 보내면 우리는 어느새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유 씨는 그런 확신 같은 것은 어디서 나냐고 했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논리적인 이유를 갖다 대어도 무의미할 그런 느낌이다.


유 씨가 없다는 상상은 나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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