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후, 밤이다. 창수는 어둠 속을 걸어가고 있다. 서부교회 맞은편에 있는 마을 회관까지 가는 동안 저녁 식사 때 본 외할머니와 이모의 얼굴을 자꾸 떠올라 창수는 우울해진다. 다시는 그분들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맺힌다.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든 걸일까. 형 때문이야. 난 진정 그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할 의도는 없었어.
창수는 형광등이 환하게 켜진 마을 회관 방으로 들어선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복근이 비밀을 공유한 자로서의 의미 깊은 미소를 창수에게 보여 준다. 그 얼굴이 경멸스럽다고 느끼기 전에 다른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길고 좁은 얼굴, 볼에 박힌 주근깨, 고개를 뒤로 젖혀야만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키가 큰 아이가 창수를 보고 있다. 학교에서 얼핏 본 것도 같지만 창수는 그 아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야는 민성이야. 야도 우리하고 처지가 별로 안 다르거든. 집에서는 늘 공부 안 한다고 나무래고, 또 일 안 헌다고 얻어맞고. 도저히 집에서 견딜 수 없는 애거든. 내가 이 애한테만 가출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더니 같이 가자고 사정하더라.”
예정에도 없던 일이라 창수는 당황스럽다. 계획을 취소해버릴 수는 없을까. 화가 치밀어 올라 자신도 모르게 양미간을 찌푸린다. 이윽고 창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린다. 복근이 거 봐, 하는 눈빛을 민성에게 건넨다.
“우리 어머니는 말이야. 내가 저녁마다 곶감 서리나 하러 다니고 짤짤이나 하러 다니니까 아예 밤만 되면 밖에서 문을 잠궈 버리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떠나기로 하는 날은 누군가가 와서 문을 열어 주어야 돼.”
“내가 열어주면 되지.”
민성의 목소리는 느리지만 굵다.
“밤에 떠나자고?”
“그래, 낮에 떠나는 것보다는 밤이 더 안전할거야.”
창수의 의문에 복근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는다. 실상 창수는 떠난다고만 생각했지 구체적인 계획은 생각지 못했다. 복근이 손에 들고 있던 배구공을 민성이에게 던진다. 공받기 놀이를 하자는 것이다. 민성이는 복근이 던져주는 공을 받더니 창수에게 던지려다가 다시 복근에게 던진다.
“야, 얼마 후면 우리는 공부 같은 것은 안 해도 되는구나, 야 - 호!”
복근이 세차게 창수에게 공을 던진다. 공을 받으며 창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집을 떠난다는 생각, 누구의 지배나 명령을 받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신세가 된다는 것, 그것은 창수 또래 아이들에게는 어떤 일보다도 흥미롭고 유혹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중요한 세부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이 헤어졌다. 모두가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에, 또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마을회관에서의 만남 이후로 그들은 학교 내에서도 자주 만났다. 그들은 후정이 보이는 창가에서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는 듯이 서로 쿡쿡 찌르기도 하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며 장난을 쳐댔다. 이것을 보고 별 싱거운 녀석들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보는 아이들도, 이상스럽게 생각한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벌이는 수상쩍은 행동과 머지 않은 앞날에 벌어질 일을 연관시켜 생각한 아이는 없었다.
창수는 이 일에 대해 일체 입을 다물었다. 식구들에게 그런 낌새를 비치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했다. 심지어 저녁이면 매일 집으로 놀러 오는 친한 친구인 용희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일주일이 뒤, 쉬는 시간에 복근이 창수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창수가 복도로 나오자 옆반 창문 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복근이 손짓을 했다.
“무슨 일로?”
창수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싱글거렸다.
“응, 몇 사람을 더 우리 일에 끌어넣기로 했는데 네 생각은 어떠니?”
순간 창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다. 민성이를 끼워 주기로 한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웠는데 다른 아이들까지. 문득 창수는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두려움이 일었다. 둘이었을 때, 아니 셋까지도 좋았어. 하지만 이건 아니야. 이제 비밀은 유지될 수 없을 거야. 복근은 여러 사람과 함께 행동해야만 죄책감이나 불안함을 잊어지는 모양이지만, 난 아니야.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는 이 일에 빠질 거야.”
이 말이 얼마나 비겁한 것인지 창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 것보다 더 간절하게 그는, 지금 그들 사이에 낀 자신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너 겁쟁이로구나. 자식이 저밖에 모른 놈이구만. 의리도 없이.”
화가 난 복근이 복도 한쪽에 침을 뱉았다. 창수는 아무래도 좋았다. 창수는 의리 같은 것에 연연해 본 적은 없다. 그는 다시 교실에 들어 와 앉았다. 그들이 떠나든 말든 이제 상관없는 일이다! 조금 전까지 느끼고 있었던 감당하지 못할 중압감이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없다. 창수는 원점으로 되돌아와 있다. 그들로부터 자유롭다는 생각에 새삼스레 기쁨을 느껴진다.
그 날 내내 창수는 홀가분했다. 배신자가 된다는 것도 기분이 나쁘지 않군. 그런데 이틀 후가 되자, 그의 내부에서 더 큰 고통을 주는 덩어리가 올라와 있었다. 그것은 시시각각으로 창수를 괴롭혔다. 처음에 도망가자는 말을 꺼낸 것은 너였어, 그것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교생 540명과 교직원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일을 혼자만이 알고 있다는 것도 창수는 견딜 수 없다. 선생님께 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는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결국 그는 선생님께는 말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님은 가까이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처음에 가출하자고 내가 제의한 것을 복근이 잊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기억하고 있더라도 설마 남아 있는 누구에게 그 사실을 말하고 떠날 리는 없을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흥분과 불안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창수는 누군가 복근 일행의 도주를 말려 줄 사람을 찾았다. 그는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으로서의 짐을 덜려 하고 있었다.
궁리 끝에 창수는 매일 저녁이면 집에 놀러 오는 용희에게 사실을 털어놓기로 작정했다. 용희는 동급생은 아니었지만 복근이 반의 반장이었기 때문에 혹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다. 창수는 정말 교활했다. 그는 용희에게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처럼, 누군가에게 우연히 들은 것처럼 복근이 일당의 가출모의가 무르익어 가고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그들을 말리는 것이 친구로서의 의무가 아니냐고 천연덕스럽게 주절댔다.
“그게 사실이야?”
용희는 입을 쩍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창수가 알게 된 연유 같은 것은 묻지 않았다. 그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그게 사실이냐? 그러면 내가 복근이를 만나 봐야겠다.”
용희는 당장이라도 복근을 찾아갈 것처럼 흥분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창수는 용희로부터 기다리던 대답을 들었다. 용희는 기쁜 얼굴로 복근을 만나 알아듣게 몇 십분 이야기했더니 절대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창수는 일단 안심이 됐지만 복근의 말이 진심이라고 믿을 수는 없었다. 포기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이젠 하는 수 없어.
창수는 용희의 어깨를 툭 치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용희도 마찬가지였다. 자칫 커질 뻔했던 사건을 자신의 힘으로 막았다고 생각해서인지 아주 기뻐하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