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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산호 Aug 20. 2024

무대일가 13

 

영수가 가고 난 후 동섭은 마음이 산란했다. 그는 화를 삭이기 위해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얼굴은 열기로 인해 화끈거렸다. 이 건방진 놈이, 하면서 뺨을 후려갈겼더라면 얼마나 멋지고 사내다웠을 것인가. 내가 너무 자유방임 식으로 애들을 키워서 그럴 것이다. 그는 다시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전주댁은 다시 앞집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작은방 문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창수가 온 모양이었다. 녀석이 어디 있다가 온 것일까. 문득 얼마 전의 일이 그에게 떠오른다. 수리잡안(지명) 밭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잠시 고개를 드니 멀리 교복을 입은 영수가 걸어오고 있었다. 영수가 거기까지 찾아오는 것은 분명 제 아쉬운 까닭이었다.  


  “돈 주세요!”


  아니나다를까 영수는 제가 맡겨 놓은 돈처럼 당당하게 달라고 했다. 정말 이럴 땐 동섭은 황당했다. 이번에는 어디서 돈을 꾸어다가 녀석에게 주어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전주댁은 어느 쪽도 보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동섭은 이것을 하나의 신호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도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얼마 후였다.  


  “이 놈이 어디를 갔지?”


  전주댁이 펄쩍 놀라며 호미를 놓았다. 동섭도 하던 일을 멈추고 밭가를 보았다. 조금 전까지 하얀 교복을 입고 서서 돈을 내라고 말하던 영수가 간 곳이 없었다.  


  “지가 자식이먼 부모가 일을 하고 있는디 도와 줄 생각은 안 허고 밭가에 서서 돈만 내라고 허다가 어디로 가부리여? 글고 내가 돈을 쌓아두고 있는디 어디 저를 안 주는 것이여, 망헐 놈의 자식 겉으니라고.”


  전주댁이 악담을 퍼부었다.


  “이 놈의 자슥 저수지 물에나 빠져 죽어 부리라!”  


  그런데 이 말을 내뱉은 전주댁의 안색이 갑자기 달라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  


  동섭의 말에 대답도 없이 전주댁은 부리나케 저수지를 향해 달려갔다. 동섭도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따랐다. 봉우리가 뭉툭해진 묘를 지나 저수지와 잇닿은 낙엽송을 따라 달렸다. 동섭의 머릿속에 불안한 상상이 쉴새 없이 오갔다. 밭에서 내리자 키 큰 풀들이 사람들이 다니는 바닥이 반질반질한 길 양가로 서 있다. 오른편에는 버드나무가 여러 그루 우거져 있다. 그런데 거기에 영수의 하얀 교복이 걸린 채 미풍에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전주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아이고, 아이고 하는 통곡소리를 내질렀다. 동섭은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수지까지 뻗은 뻘 위에 모셔진 하얀 운동화가 놓여 있고 그 위로 물을 향해 들어간 발자국이 뚜렷했다. 동섭은 입을 쩍 벌렸고 어깨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 때 수풀 속에서 입을 막고 웃을 때 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개나 쥐들이 끙끙거리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그러면서 수풀이 움직였고 동섭은 눈뜨고 보고 싶지 않은 영수의 알몸을 보았다.  


  동섭이 황당한 기억에서 벗어날 무렵 전주댁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녀는 자리에 털썩 앉더니 넋두리를 하기 시작했다.


  “즈그 아부지, 나는 인자 어찌 살란가 막막허요. 자식놈은 맨 날 와서 돈 달라고 떼를 쓰고 협박을 허는디 돈 줄 구멍은 없고…….”   


  코를 훌쩍이느라 전주댁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놈이 원래가 지 아수울 때는 사람 간을 졸아붙게도 허고 살살 녹이기도 허는 놈인디, 지가 아수울 것이 없으먼 부모 허는 말은 사람 허는 말로도 안 여기는 놈이여, 그 놈이. 맹철구라고 허는 놈이 즈그 부모가 돈도 안 주고 잔소리만 헌다고 부모를 방에 가둬 놓고 작대기 가지고 설친다드만 저 놈도 하나도 다를 것이 없소.”  


  당신도 별 수 없구만, 하고 동섭은 말하고 싶었지만 잠이 몰려오고 있기 때문에게을러진 입 근육을 다스리지 못했다. 전주댁은 상 장사를 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 때 내가 상 장사를 좀 더 허자고 헌께, 뭐하러 이런 고생 허냐고 험서 집으로 가자고 조를 때 내가 알아봤제. 이 말라비틀어진 집구석이 뭐가 좋다고, 이깐 놈의 집을 못 잊어 돌아오자고, 돌아오자고, 나한테 온갖 까탈을 다 부리드만 오늘날 자식놈한테 이런 꼬라지 볼라고 그랬제!”  


  순식간에 그 때 느꼈던 감정들이 동섭에게 달려든다. 어서 아내가 입을 다물어주었으면 하고 동섭은 간절히 기도한다. 그는 과거로 돌아가기보다는 꿈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푸른 바다를 헤엄치거나 조부를 따라 낚싯대를 메고 저수지로 가고 싶었다.


  “내가 무슨 좋은 꼴을 볼라고, 이 집구석에 시집을 와 가지고 이 날 이 때까지 이 고생을 허는지 모르겄어. 우리 어머이 아부지가 원망스러워,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어… 내가 자식들만 아니라먼 벌써 짐 싸가지고 도시로 나가서 혼자 살았을 것인디…….”  


  이제 전주댁은 도저히 그만둘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누구도, 어떤 힘도 전주댁을 막을 수 없다. 전주댁의 과거재생은 동섭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것은 원뿔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밑바닥으로 들어갈수록 더 넓고 강력한 힘을 갖게끔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의 줄을 당기면 연시처럼 줄줄이 나올 것이 틀림없었다. 동섭은 아내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간신히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잠결에 그는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일어나, 일어나!”


  전주댁이 동섭을 깨우고 있었다.  


  “제발, 제발 잠을 잘 수 있게 놔둬.”  


  동섭은 고함을 질렀다. 동섭은 자신의 고함이 메아리처럼 울리다가 서서히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영수가 동섭을 죽이기 위해 칼을 들고 쫓아오고 있었다. 분노가 인 동섭은 먼저 영수를 죽이고 싶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도망만 치고 있었다. 골목길이 나타났다. 그는 빠르게 달린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발에 맷돌을 단 것처럼 무거워 땅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간신히 몇 미터를 나아갔다. 그러다 동섭은 무엇엔가 걸려 넘어졌다. 그로서는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전주댁 같기도 하고 창수 같기도 했다. 분명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멀리서 영수가 칼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초조해진 동섭은 다시 일어서서 달리려고 했다. 역시 발이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동섭은 다급한 나머지 얼굴을 바닥에 대고 숨을 헐떡였다. 녀석은 나를 보지 못할 거야. 정말 그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갈과 흙밖에 보이지 않았다. 차별 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데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앞에는 칼을 영수가 서 있었다. 영수는 가소롭다는 듯 동섭을 노려보고 있었다. 경악한 동섭은 고함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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