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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산호 Sep 03. 2024

무대일가 14

4


 


   창수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누구의 제지를 받지 않고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창수에게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영수로부터 기다리라는 말을 들은 직후였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 그에게 강렬한 유혹으로 떠올랐다. 이탈과 격리에서 오는 해방감은 신선하고 유쾌한 것으로 떠올라 창수를 자극했다. 솔직히 그 순간 창수는 달콤한 희열까지 느꼈다.  


  창수에게 갑작스럽게 떠오른 ‘도망’은 약간 비상식적이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도시로 나가 돈을 벌고 마음껏 시내를 돌아다니고 여태까지 금지된 것을 해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불어 제끼는 휘파람 소리, 드넓은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 조각, 이리 저리 떠다니는 새들, 활활 타오르다가 남은 잉걸불을 쪼이며 보는 별, 산길을 가는 홀로 가는 외로운 방랑자의 모습. 창수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건 이런 것이었다. 창수는 정말 떠날 작정이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렇다는 대답이 가슴 한 가운데서 울려나왔다. 창수는 그 길을 하염없이, 아주 오랫동안 걸을 작정이었다. 친구들과 고향 마을과 가족들과 헤어져서. 가족들과 영영 이별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창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식사가 끝나자, 창수는 밖으로 나온다. 마루에서 토방으로 내려서면서 창수는 일단 형을 피해 숨기로 했다. 형은 그에게는 악이며 근원을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괴물이었다. 그는 집 모퉁이를 오른쪽으로 돌아 집 뒤쪽과 이웃집의 경계인, 돌담과 집 사이의 좁은 공간에 숨어든다. 이곳에 숨어 있으면 제아무리 귀신같은 영수라고 할지라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정말 이렇게 살기는 싫어.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건 하루 하루가 지옥이야. 이 고원을 벗어나고 싶다.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내일 출발하는 것이 좋겠어. 그럼 어떻게 계획을 짠다?  


  그간 창수는 우발적으로 집을 떠나본 적은 있지만 하루를 넘긴 적이 없었다. 도망쳤다가 얼마 못 가 형에게 잡히는 것은 아닐까, 창수는 불안해진다. 형은 전능한 신처럼 내게 군림해 왔고 나는 형이 한 말의 노예가 되어 있어. 이런 창수의 생각도 오래가지 않는다. 방에서 나온 지 고작 오 분도 못되어 그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자는 소린 잠 소리요 노는 소린 클 소리라.


  앞집 개야 짖지 마라. 뒷집 개야 짖지 마라


  검둥개야 짖지 마라 우리 애기 잘도 잔다.


 


  어디선가 자장가 소리가 창수의 귀에 들려왔다. 저녁 아홉 시만 되면 동섭은 전등을 끄게 하고 창수와 경수를 억지로 재우려 했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창수는 저녁 9시만 되면 스르르 눈꺼풀이 내려앉게 되었다.


  얼마나 잤을까. 창수는 눈을 뜨는 순간, 거대한 검은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란 창수는 눈을 감았다. 툭 베어진 하늘의 한쪽 단면이 앞을 막은 것처럼 느껴져 답답했다. 그것이 담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창수는 미소를 짓는다. 왜 이곳에 있게 되었는지 그는 기억을 더듬는다. 그는 곧 형 때문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어떻게 잠에서 깼을까. 그것이 신기했다. 불편한 자세 때문이었을까. 주위가 평소와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낀 것일까. 창수는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뚤방 위에는 검은 고무신이 두 켤레, 슬리퍼가 두 켤레 있다. 없다! 형이 신고 온 운동화는 옆으로 누운 감색의 다이아몬드 문양이 있었다. 창수는 천천히 마루 위를 기어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슬며시 방문을 연다. 방안에는 나무 위에 헝겊을 입힌 베개를 베고 코를 고는 아버지와 모로 누워 자는 경수가 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앞집에 마실을 간 것 같다. 창수는 방문을 도로 닫아 놓고 작은방으로 간다. 이불을 깔고 베개를 끌어다 눕는다. 등에 닿이는 감촉이 눈물겹도록 부드럽다.  


  다음 날이다. 창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형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작은방에는 없다. 부엌이나 마당으로도 귀를 기울인다. 형은 어느 곳에도 없다. 형이 집안 어느 곳에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창수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사실 그가 형을 그렇게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다. 창수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형은 대단하지도 않고 내게 어떤 권리를 쥐고 있지 않아. 그럼에도 영수는 스스로 권력을 증대시켜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창수를 억압하고 있었다.


  순간 창수는 막 잠에서 깨었을 때 느낀 꿈의 조각들 속에 불쾌한 것이 묻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 저녁에 느껴졌던 불안 덩어리가 아직까지 내부에 있는 것이다. 문득 그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언제 또 이런 일이 닥칠 지 알 수 없었다.  


  조반을 먹고 나자, 창수는 헛간에서 자전거를 끌어냈다. 자전거는 그가 영수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벌써 6년째 되는 것이다. 자전거가 영수 소유였던 시절에 그는 감히 그것에 손을 대지도, 끌고 다니지도 못했다. 언젠가 그는 앞집 상열이와 함께 자전거를 몰래 몰고 나갔다가 형에게 호되게 당했다.  


  창수가 안장에 올라 페달을 밟자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모퉁이를 돌다가 하마터면 앞서가던 소의 엉덩이를 들이받을 뻔했다. 이 때문에 소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이런 망헐 놈이!”


  소를 몰고 가던 갠동 양반이 버럭 고함을 지른다. 깜짝 놀랐지만 창수는 고개를 꾸벅 한번 숙이고는 얼른 달아난다. 어물쩡거리다가는 어떤 욕을 얻어듣게 될지 몰랐다. 하긴 이 정도는 갠동댁에 비하면 아주 약과라고 할 수 있다. 갠동댁은 지독한 노랑이에다가 욕쟁이였다. 그녀는 예사로 쫙쫙 찢어 죽인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해대는 여자였다. 어쩌면 갠동양반은 처로부터 욕을 배운 것인지 몰랐다. 갠동양반은  농판이(바보)나 다름없어서 매일이다시피 아내에게 구박을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욕지거리를 듣고 있다는 것을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자전거는 집앞(지명)을 지나 젊음뚱(지명)을 거쳐 신작로를 달린다. 지금멀(지명) 다리를 건너 힘들게 오르막을 오르자, 멀리 오른편에는 구암, 정면에는 구지내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스르르 미끄러져 가는 자전거 안장 위에서 창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 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신작로 위에는 오로지 창수 혼자밖에 없다. 들에서 일하는 사람도 없었다. 구지내기 정미소를 지나자 창수는 더욱 속력을 낸다. 자갈 하나 박히지 않는, 자전거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리는 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진장 마을이 나타난다. 그곳을 통과하는 동안 그는 혹시 아는 친구들이나 선생님을 만날까 싶어 지나는 내내 고개를 움츠린 채로 달린다. 이런 때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조금도 즐겁지 않은 일이다. 전파상, 지서, 자전거 포, 라주집, 학교입구를 가리키는 표지판, 이런 것들이 하나씩 스쳐 지나간다. 다행히 창수는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마을 사이에 난 길을 빠져 나오는 동안 창수는 도망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는 어젯밤 집에서 도망치기로 작정했었는데 잠시 그것을 잊고 있었다. 형은 가고 없지만 언제 다시 올 줄 몰라. 불안함이 가지를 치고 뻗어나간다. 나는 왜 자전거를 끌고 나왔을까. 도망치려고 나온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무언가 의심스러울 것 같다. 지금이 방과 후라면 다르다. 외갓집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무심결에 외갓집으로 핸들을 돌린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나는 방과 후면 아무 때고,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면 삼거리에서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고 난 집에서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잿뎅이 논을 지난 후 완만하지만 긴 오르막이 나타난다. 힘겹게 오르는 동안 창수는 서서히 지쳐간다. 한굽이를 지날 때마다 경사가 더해지는 오르막이 나타난다. 그것이 창수에게 사람들이 비유한 인생길로 나타난다. 우울해진 그는 눈물을 한 방울 떨구었다.


  드디어 창수는 장탯재 마지막 고개가 보이는 곳까지 왔다. 거기는 자전거를 타고 넘기에는 힘겨운 곳이었다. 중간에 내려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창수는 힘껏 페달을 밟아 장탯재 고개에 도전해 본다. 자전거가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거의 정지 상태에 이른다. 늘 섰던 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육체적인 한계다. 자전거에서 내린다. 창수는 자전거를 끌고 장탯재를 걸어서 넘는다.  


  정상에서 창수는 다시 안장에 오른다. 페달을 밟지 않아도 자전거는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속력이 갈수록 빨라진다. 하지만 그는 제동을 걸 이유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


  “야, 창수야, 어디 가냐?”


  구영교를 막 통과했을 때 누군가 창수에게 제동을 걸 것을 요구한다. 그는 왼손으로 브레이크를 당긴다. 끼- 익 하는 소리를 길게 내며 자전거는 멈춘다. 그를 부른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창수에게 다가왔다. 동급생인 복근이라는 아이였다. 이런 곳에서 아는 사람들 만나자 창수는 반가워 싱글거렸다.  


  복근은 창수가 고개마루에 서 있을 때부터 아래에서 보고 있었다. 단지 창수가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느라 알지 못했을 뿐이다. 창수는 복근과 안면은 있지만 말을 해본 적은 없다. 복근은 동급생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복근은 열등생에다 말썽꾸러기였다. 창수는 복근과 함께 어디론가 도망쳤으면 좋겠다 싶어 아주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 너로구나. 지금 외갓집에 가는 길이여.”  


  “그래, 그러면 같이 가자.”  


  복근의 제의에 창수도 동감을 표시하고 자전거에 올랐다. 자전거가 나란히 나아간다. 자전거 바퀴의 쉿쉿 하는 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눈다.  


  “야, 우리 멀리 도망 안 갈래?”


  “그래, 까짓것 좋다!”


  복근은 별로 생각하는 기색도 없이 대찬성의 뜻을 표시한다. 창수는 복근의 대답이 반가우면서도 덜컥 겁이 난다.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도망이라는 것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이다. 하지만 어젯밤 같은 경우가 다시 생긴다면? 난 떠날 것이다. 이미 떠나버린 말을 채찍질하여 다시 되돌아오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둘은 면사무소 뒷길에 세워져 있던 달구지에 걸터앉았다. 복근이 먼저 말을 꺼낸다. 매일 저녁 선배, 후배들과 어울려 일명 ‘짤짤이’를 하고 있는데 그런 대로 시간 보내기에는 괜찮다는 것이다. 복근은 곶감 서리도 한다고 말한다. 복근의 이야기에 창수는 귀가 솔깃해진다. 창수는 복근의 말에 견주어 떨어지지 않는 말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한다. 실지로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돼. 그래야만 같이 일을 꾸밀 수도, 친해질 수 있어. 그런 점에서 창수는 교활하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리하다가 창수는 먼저 번 시험 때 컨닝했던 사실을 털어놓는다. 복근은 놀라움에 거의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 된다. 그렇지만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다.  


  “네가 모범생인줄만 알았더니.”


  겸연쩍어 창수는 머리를 긁적인다.  


  “요즘은 집에 있기가 싫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니까.”  


  “그래? 그건 나도 그래.”  


  복근이 팔을 뻗어 창수의 손을 잡는다.


  “그런데 언제가 좋을까?”


  “다음 주가 어떨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만 그 전에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아.“   창수는 적극적이 되어 가고 있다. 이제 다시 똑같은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의지를 단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럼, 집에는 어떻게 하지?”  


  “가기 전에 편지를 한 장 써두면 되잖아. 부모님 앞으로 말이여. 저를 찾지 마십시오.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부모님께 효도할게요 라고 말이여.”  


  “그래, 그러면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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