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일 년 정도가 지났을 때야. 그를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했던 국이나 혁이 일당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학원을 그만둔 시점일 거야. 물론 동이도 학원을 그만 다니게 되었지. 간혹 이 애들은 무리를 지어 학원 앞을 지나가기도 했어. 그를 보면 멀리서부터 큰소리를 지르며 반갑게 얼싸안으려 했고. 그것을 보면서 그는 그들로 인해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은 일시적으로 잊어버렸지. 다음에는 진짜로 하나씩 둘씩 잊었지. 아이들이란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가 되뇌면서. 중학교 선배들에게 불려 가 한창 맞고 다닐 때 문제를 금방 해결해 주지는 못했지만, 그가 조언은 해준 적이 있어. 학교 운영위원으로 참여하던 원장 말처럼, 학교에 알린다고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었거든. 요즘도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피해 학생들만 여전히 고통스럽지. 그렇게 믿는다면 그 사람이 순진한 거지.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그는 이렇게 말해주었어.
“참으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야. 너희들을 괴롭히는 그놈들은 지금 지 맘대로 언제까지나 너희들을 때리고 밟을 수 있고 빵셔틀을 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뿐이야. 그 애들은 그걸 몰라. 정권을 쥐고 흔들던 어느 시대 어떤 인사들처럼 말이야. 나도 중학교 다닐 때, 때린 놈에게 복수한다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무술까지 배우려고 했지. 하지만 막상 복수를 실현할 때쯤이 되니까 중학교 시절이 다 끝나 버렸어. …곧 끝나. 조금만 참고 네 길을 준비해. 너희가 학교 졸업하고 나면 그런 놈들 보고 싶어도 못 만나. 이상한 일이지만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 저한테 맞은 애들이 복수할까 봐 도망가는지 모르지. 그러니까 아주 잠시야, 잠시. 너희들에게 하루하루가 긴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이후 학원은 여전히 아이들이 들락거리며 그들의 빈 자리를 메꾸었어. 그중에 문기라는 애가 있었어. 그가 문기적거린다고 장난을 걸기도 했던 애지. 그래야만 아이들하고 친해지니까. 사건은 문기 어머니 전화로 시작되었을 거야.
“어제 국어 선생님한테 맞은 것 때문에 다른 친구하고 같이 학원에 안 가기로 했대요. 선생님이 달래주세요.”
그가 녀석을 때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 변명일지 모르지만, 1대 살짝 때렸을 뿐이었어. 그것도 욕을 했기 때문이었어. 그것이 단지 제 기분을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향하는 곳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알다시피 무지막지하게 아이들을 패는 부류는 아니었어. 매를 대지 않으려는 초창기의 결심을 지키내지는 못했지만, 원장의 말대로 손 끝부분을 잡고 손바닥의 도톰한 부분을 1대씩 때리기로 했어. 강하게 단 한 대. 여기에는 기술이 좀 필요했어. 아이가 손을 빼기도 하고, 제대로 내리치지 못해 곧잘 빗맞기도 했으니까. 체벌은 아주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어. 그러니 아이들도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할 정도였어. 손바닥이 아프지 않다면 매를 때린 줄도 모를 정도로 말이지. 간혹 손바닥을 맞고 이런 애들도 있었어.
“하나도 안 아프네.”
그러면 그가 짓궂게 그랬지.
“그러면 한 대 더 맞을까?”
그러면 아이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고. 아이들이 왜 곧잘 산만해질까. 영어 선생 말처럼 애들이 공부하기 싫으니 그러는 짓이기는 했어. 그러나 아이들을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어. 참고 기다려 주는 게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말이야. 사실 아이들 교육이 문제가 아니라 원장의 얼굴이 나타나 수입을 문제라고 할 것 같았으니까. 제발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은 받지 않으면 안 될까요, 원장에게 이런 말도 해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학원 문을 닫으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어.
“재수가 선생님 때문에 나간 거래요.”
반 아이 중 누군가 일러주었어. 재수라면, 어제 욕을 하다가 반말하며 학원을 스스로 걸어 나간 녀석이었어. 그는 화가 나지는 않았어. 재수라는 아이를 재수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어. 그 애는 언젠가부터 이 학원을 나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어. 만만한 그에게 학원을 그만둔 이유를 뒤집어씌우고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물론 이건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 다른 학원에서 얼마를 받기로 했다는 것도.
“음, 그래. 그렇게 말하는 건 좀 그렇네.”
그는 부드럽게 혼잣말처럼 말했어. 4교시 마지막 시간이었어. 자습을 하던 문기가 자리에서 일어났어.
“선생님 물 마시러 가도 되지요?”
“음, 갔다 와.”
그가 갔다 오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기가 욕지거리를 하며 나가는 게 아닌가.
“에이 씨팔 좆같네.”
당황했지만 그는 문기를 불러 세우지 않았어. 이 녀석도 학원 다니기 싫은가보다 생각했을 따름이지. 재수처럼 다른 학원으로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해서 그런가. 그냥 내버려 둘까. 그는 생각하다가 모방범죄를 막기로 결심했어. 연달아 아이들이 학원을 그만둘 수도 있었고. 잠시 후 문기가 돌아왔을 때 그는 녀석을 불러 세웠지.
“엎드려뻗쳐!”
문기는 그가 시키는 대로 바닥에 손을 짚고 엎드렸어.
“에이 시팔!”
문기가 다시 욕을 내뱉었어. 그를 향한 것인지, 학원을 향한 것인지, 세상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욕이었지. 화가 난 그는 문기의 엉덩이를 때렸는데 하필이면 도톰한 살에 맞지 않고 비켜나고 말았어. 화가 나서 끓어오른 탓이었지. 그 순간 문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외쳤어.
“집에 갈랍니다.”
그 순간 그는 일이 잘못된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 있었어. 문기가 기다리던 것은 이거였어. 그러나 그는 문기를 잡지 않기로 했어. 일이 어떻게 되어가든 잡는 것은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들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본인 꼴만 우스워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고.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문기 어머니와 통화를 끝낸 후 원장이 물었어. 그는 있는 대로 사실을 말했어. 약간 미안한 태도로 말이지. 그의 말을 들은 원장은 다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어. 어머니는 통화 중간에 아들인 문기를 바꾸어 주었고. 그것은 보고 있던 그는 답답했지만 하는 수 없었지. 또다시 문기로 인해 불똥이 튈까 조바심을 낼 뿐이었지.
“그래, 내일은 나와야 해. 알았지?”
이 말을 끝으로 통화는 끝났어. 전화기를 내려놓고 원장이 그에게 그랬어.
“내일 오면 잘해주세요.”
여기서 끝났더라면 그는 원장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을 거야. 애초 100달러를 기부하려고 했던 신도가 목사의 설교가 길어지자, 기부금을 1달러로 바꾸었다는 만화처럼. 그러나 원장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기어이 사회 선생을 입에 올렸어.
“사회쌤이 사람은 착한데 결정적으로 한가지가 잘 안 돼요. 착해서 인기가 있을 법도 한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 아니 알 것 같기는 했지만 원장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어. 어떤 의도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지. 그렇다고 그가 물을 계제는 아니었고. 그때 어제의 불시착이 떠올랐어. 아이들을 내려주고 집으로 가던 차에 학원 봉고차가 중앙병원 신호대 앞에서 갑자기 스스로 멈춘 것. 위험하기는 했지만, 그는 비상 깜빡이를 켜고 세워두는 대신 기어를 중립에 놓고 차를 도로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어. 차는 잘 밀리지 않았어. 차가 오는 것에 주의하느라 그는 한껏 긴장해 있었어. 곧바로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는 여전히 차를 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오랫동안 힘겹게 밀고 있던 그 순간처럼. 그때 문기의 얼굴이 휙 다가오고 그는 문기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있었어. 그는 한쪽으로 밀어낸 봉고차 옆에 문기가 서 있는 것을 보았어.
“힘들지만 역시 힘을 내십시오.”
돌아보니 영어 선생이었어. 그는 나이 스물일곱에 생머리를 늘어뜨린 채 미소 짓는 그녀를 바라보았어. 그녀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사랑으로 보고 있을까. 연민으로 보고 있을까. 나이 차가 이십 년이나 났지만 웃을 때 잇몸이 드러나는 그녀가 매혹적으로 보였지. 그는 처음 영어 선생이 정장 차림으로 면접을 보러 왔을 때를 기억했어. 하얀 백합처럼 늘씬하고 향기로웠지. 그래서 그는 아이들이 새로 온 영어 선생님에 대해 예쁘냐고 물었을 때 자신 있게 말했어. 아, 예쁘지, 예뻐! 그러나 며칠 후에 아이들은 그에게 속았다고 그랬어. 예쁘지 않아요, 실망스러워요. 아이들의 말에 그는 속으로 그랬지. 나도 이제 구식이 되었나 봐.
그의 책상으로 다가온 그녀가 하얀 두 손으로 흑갈색 초콜릿을 내밀었어.
“그냥 제 성의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오늘이 성 발렌타인데이라는 걸 알아챘어. 그렇다면 이건 사랑의 선물인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어. 아니 그렇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할 마음은 없었어. 그는 악처일지라도 아내를 사랑하기도 벅차다고 느끼고 있었거든. 그리고 그는 언제든 이곳을 그만둘 각오가 돼 있었어. 한 마디로 안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다니는 직장이었지. 죽을힘을 다해 정상을 향해 매시간, 하루하루 바위를 밀어 올리고 있는 시시포스. 그는 어느 곳에선가 읽었던 카뮈의 구절을 떠올렸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며 늘 그대로 이어질 리 없어. 공간이 바뀌어도 그렇지만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감정들이 만들어지지. 고통이 기쁨으로, 복잡하고 심란함이 우아함으로. 그는 이 글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