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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ison Lee Nov 25. 2021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아는 엄마가 물었다.


OO이는 학원 어디 보내세요,

4학년이면 다들 경시 준비하던데,


그러고 보니 옆집, 윗집, 아랫집이

이미 다 대치로 이사를 갔던가.


그리고 그녀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요즘은 진로를 일찍 정해서 책도 그에 맞게 읽히고

특별활동도 맥락 있게 해야 한다고.

그러니 문과 성향인지, 이과 성향인지

이제는 부모가 파악을 해 줘야 할 때가 됐더라고.


뭐.. 나도 몇 번씩은 들었던 얘기긴 한데,

정말, 그런걸까.


-


나는 학창 시절 내내 방황을 많이 한 축에 속한다.

흔히 무용담처럼 얘기하는 종류의 방황이라기보다

진로 자체가 극단적으로 바뀐 케이스인데,


국민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내가 적어 낸

첫 번째 장래희망은 ‘앵커우먼’이었다.

(그 당시 뉴스데스크의 백지연 앵커는

 존재만으로도 어린 내 눈에 가히 충격적이었다.

 요즈음의 고운 아나운서들과는 결이 약간 다르다. )


그런데 나는 만 3세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국민학교 내내 우리 학교 ‘우물’ 안에서는

피아노를 제일 잘 치는 학생이었으므로

고학년이 되면서는

당연히, 막연히, 근거 없이 음대를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고 보니

점점 내 재능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고

예술을 한다는 건 이 정도의 깜냥과 열심으로만

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마침 중학교 3학년 초에 심한 폐렴으로

한 달 넘게 입원하면서 실기 준비 망했다는 핑계와

음악보다 공부가 니 적성이라시던 담임 선생님의 조언에

예고 진학의 꿈은 완전히 접었었는데

사실은 내 역량으로 명확한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그냥 저 포도 시다 했던 것이기도.


그리고 나는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친구 한 놈과 의기투합 해

 당시 학교에 있지도 않았던 영화/음악 동아리를 만들어 학교만 파하면 비디오 대여점으로 직행했다.

신문방송학과 가서 방송하려고.

(근데 그게 정확히 뭐 하는 건지도 몰랐음.)

(비디오 대여, 로드쇼 프리미어 GMV 용돈 탕진하는데 도움 주신 부모님께  자리를 빌어 감사를..)


그리하여 나는 문과로 전향하여 외고에 진학했고

똑똑한 친구들을 보면서 쓸데없이 자극되어

문과의 정점은 법대이니 당연히 나도 법대를 가야지,

막연히 법대 갈 거야 vs.(근데 신방과 가고 싶은데)의

갈래에서 또 공부는 안 하고 유희열 듀스만 쫓아다녔지.


근데 외고 학생들 특유의 치열한 공부가

무려 예술하고 싶었던 내게는 맞지도 않았고

뒤늦게 사춘기까지 왔던 탓에

야자시간마다 음악실에 죽치고 앉아 1년 반을 보내다

결국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 싶어 과감히 자퇴를 했다.

(내가 특별히 ㄸㄹㅇ 였던 것은 아니고

 그때가 전국 특목고 자퇴 붐의 시기였음)

다른 친구들은 다

‘서울대 가고 싶은데 내신 때문에 불리해서요’ 할 때

나 혼자 ‘선생님 저는 다시 음악 하고 싶어요’ 하는

택도 없는 소리를 남기고 학교를 떠났었지.

(죄송합니다 피바다 선생님)


그리고 같이 자퇴한 친구들과 팀을 짜서

재수학원에 반 하나 만들어달라 하여 고3을 보냈는데

학원이니 출석도 안 중요하겠다

뭐 맨날 영화 보러 조퇴하고 콘서트 보러 도망가고

학원 자습실  피아노 학원에 연습실 빌려 다니고


결국 대입을 치고 보니

음대는 갈 재능이 안 되고

실용음악과는 쟤 뭔 헛소리니 하는 반응에

원하는 법대는 성적이 모자라고

신문방송학과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아니라 그러고 재수는 절대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의대 갔다가 사시 치면 유니크한 법조인이   있다는 아빠의 -돌이켜 보면 삶은 호박에 이도  들어갈- 구라와 사기에 홀딱 넘어가서 일단 의대를 가기로 했다.

그때까지 나는 의사가 장래희망인 적이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어린 시절의 나는 스무 살이 될 때 까지도

나의 적성이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


저 엄마 말대로라면,

오늘날 내가 입시를 했다면

이도 저도 아닌 잉여인간으로 아무 데도 못 갔을 것 같은데,


요샛말로 공부 잘했던 아빠 조언 듣는 게

대치에서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것도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아이들에게

한 줄로만 이어진 길을 가라고 할 수가 없다.


적어도 내가 경험하고 아는 바,

세상에 허투루 지나가는 공부란 없다.


내 삶에 문학이, 음악이, 영화가, 신문이, 역사서가

과연 의학보다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의 갈지자 인생이 과연 무용한 것이었을까.


직업을 뺀, 아니 빼지 않고도

나의 삶 전반을 지배하고 살아가게 하는 것은

저 ‘쓸모없는’ 학습의 열매가 대부분이다.


나는 그 모든 열매를 차곡차곡 간직한 채

직업을 확장시키고 취미를 유지하는가 하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노후를 설계한다.


-


어차피 10년 뒤 세상은 지금 같지 않을 거고

대학의 형태도 직업의 개념도 삶의 범위도 다를 것이다.

지난 10 스마트폰 하나로 세상이 어떻게 개벽했는지, 코로나 이후    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우리 다 봤잖아.


앞으로 또 10년 뒤, 그리고 20년 뒤,

우리 아이들은 국내외 대학의 경계 없이 경쟁할 것이고 

평생 적어도 두세  이상의 직업을 가져야  테고

모르긴 해도 높은 확률로 120세까지는 살 것 같은데

그럼 정말 가르쳐야 하는 가치는 뭐냐는 거지.


중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건 교과서나 매뉴얼 없이도

날 것 그대로의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본인만의 학습 방식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배워  경험과 숙련(영어는 기본, 2외국어와 컴퓨터 언어 포함)


본인의 콘텐츠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설득할  있는 언어적/비언어적 소양


전 세계 어느 곳, 혹은 지구 밖 어딘가,

어떤 정세와 경기와 자연재해적 상황에서도

민첩하게 적응할 수 있는 유연한 대처 능력.


그런 거 아니겠냐고.


인간이 80세를 살건 120세를 살건

스물 넘으면 부모 품 떠나는 건 똑같고

그때에 인생이 결정되지 않으리란 건 너무나 명백하니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갖은 경험과 잡다한 소양으로 촘촘히 채워

떠나보낼 작정이다.


그래 가지고는 SKY나 Ivy 못 간다고 협박들 하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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