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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길 1 04화

씻김굿과 살풀이

by 최연수

무형문화재 전수관에서 열리는 진도씻김굿과 살풀이춤을 관람하였다. 아주 어렸을 적에 변변한 볼거리가 없었던 시골에서는, 노래․춤․극이 한데 어우러진 무당의 푸닥거리가 유일한 굿이었다. ‘굿 보러 간다’면 의례 무당 굿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민속에 관심과 호기심을 갖게 되면서 이따금 이곳을 찾는데, 크리스천으로서 비기독교적인 이런 무속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아이로니칼(ironical)하지만, 상극(相剋)일 수 있는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하는 토양이 어떠한 것이며, 기독교가 뿌리 내리기에 어려운 환경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도, 씻김굿을 통해서 비통해 하는 유가족들이 위로 받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나 망자(亡子)가 한을 풀고 극락왕생(極樂往生) 한다는 뜻을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액귀(厄鬼)가 주위 어딘가에 도사리고 앉아서 나를 엿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마 품에 꼭 안겨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죽은지 한 달이 채 안된 상문(喪門)에서 액귀는 참으로 불길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승을 떠돌며 살아 있는 가족들에게 질명이나 재앙을 가져온다고 믿었으니까 말이다. 이 액귀를 잘 달래기 위한 것이 씻김굿이라는데, 액귀는 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복을 주지 못할지언정 화를 주는 것일까? 생전에 가족들에게 어떤 한이 사무쳤으며, 어떻게 원통하게 죽었기에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그렇게 복수를 해야만 한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도 했었다.

한편 흉살(凶煞)이 뻗쳤다는 말을 가끔 들으면서 자랐는데, 나이 들어

독한 악귀(惡鬼)가 액(厄)을 품어낸다는 것임을 알게 되고, 이 살(煞)로 말미암아 원한을 품고 죽은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씻어내는 춤이 곧 ‘살풀이춤’임을 또한 알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일종의 정화(淨化) 과정인 연옥(煉獄)을 거쳐야 한다고 믿으며, 죽은 사람을 위한 연도(煉禱),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진혼곡인 레퀴엠(requiem)의 연주 모두가 그런 뜻일 것이다. 아무튼 우리 선인들의 사생관(死生觀)을 엿볼 수 있는 무속의식(巫俗儀式)을 구경하면서 ‘죽음과 삶’ 문제를 생각해본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은, 죽음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잘 나타낸다. 죽음은 억지로 저승사자에게 끌려가서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서야 하는 공포, 혹은 사후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별해야 하는 슬픔, 인생의 미완성으로 인한 아쉬움 등....그러므로 죽음을 애써 회피하고 금기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승길이 대문 밖이다’는 속담이 있듯이,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가? 언제 갑자기 닥칠지 모르는, 그러나 확실한 예정이 아닌가?

오랜 동안 노인학교를 운영하면서 구호처럼 ‘9988234’를 외친다. 또한

.........

70에 맞이하러 오거들랑 지금 외출중이라고 말하시오.

80에 맞이하러 오거들랑 아직 너무 이르다고 말하시오.

90에 맞이하러 오거들랑 그렇게 보채지 말라 하시오.

100살에 맞이하러 오거들랑 때를 보아 가겠노라고 말하시오.

라는 노래를 신나게 부른다. 입버릇처럼 ‘어서 죽고 싶다’ 하는 분에게

“사흘만 굶으면 죽을 수 있습니다.”

한다면 그렇게 굶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월남전에서 사지를 다 잃은 사람이,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실토 했다는 이야기를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 자살 미수, 혹은 임종 직전까지 갔던 사람도 죽음의 의미를 망각하거나, 오히려 생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한 법이 아니겠는가? 암 수술을 받은지 7년이 되어 완치된 된 친구에게, 암에 걸린 후 인생관이 달라졌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엔 삶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는데, 먹고 살기에 바빠 좀 지나니 마찬가지더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부모형제를 사별하고, 수년간 교회 경조(慶弔)위원장으로서 수많은 장례예배에 참석하면서, 그 때마다 기도를 많이 해왔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천국 가는 출발이며,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해왔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전7:2)라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죽음과 삶의 문제를 되새겨보곤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역시 망각의 물결에 휩쓸리곤 한다. 그래서 일주에 한 번씩이라도 교회나 절에 가는 것이, 초상집에 갔던 건망증을 피하려는 의미, 신 앞에 맨몸으로 서서 언제인가는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를 되새겨 보려는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교회의 행사 가운데, 죽음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관 속에 커다란 거울이 있고, 그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거나 아예 관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일, 또는 자기 묘 앞에 세워질 묘비명을 스스로 써보는 일, 혹은 호스피스(hospice) 강습을 받을 때 유언장을 쓰는 일 등이 있다. 그리고 웰다잉(well-dying) 상품의 하나로 임종 체험 프로그램까지 등장했다. 옛날 시골에서 수의를 장롱(欌籠) 속에 미리 마련해 두거나, 관을 짜서 뒤란 모퉁이 처마 밑에 걸어두거나, 가묘(假墓)를 만들어 미리 들어가 누워보거나 했던 어른들도, 어떤 의미에서 죽는 연습 곧 웰다잉이 아닐 수 없다.

늙으면 초상집 가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어 꺼려하고, 친구 동료들의 부음을 들으면 침울한 것이 노인이다. 잘 믿는 크리스찬이라도, 예수님의 천국 비유가 실감나지 않고, 계시록의 하나님의 나라가 최상의 좋은 곳이라 하여도, 어느 누가 당장 가고자 할 것인가?

무병장수하겠다는 의지와 믿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백 년 천 년 살 것 같이 죽음에 대한 이해나 대비를 전혀 안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노인학교에서, 원주희 목사의 저서 명대로 ‘죽음, 알면 이긴다’는 강의를 한 바 있다. 아내와 딸․자부가 그 분의 호스피스 강의를 수료하였고, 이후 매월 ‘샘물호스피스’ 봉사를 하고 있는데, 그 소속 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나도 이 팀에 섞여 두어번 가서 봉사를 해보았다.

어르신네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으나, 죽음 문제는 곧 삶의 문제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열게 된 강의였다.

‘죽음학’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현대인은 ‘나의 죽음은 없고 너의 죽음만 있다’고 전제하면서, 죽음은 마지막 성장이라고 하였다. ‘죽음은 인간 최후의 숭리’라고 말한 존 번연의 말과 같은 뜻이다. 로스는 죽음은 자연스런 질서요 진리이며 신비이다. 그것을 배우고 친숙하게 여김으로서 죽음의 공포, 혐오감을 극복할 수 있는데, 그 미지의 세계를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에게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삶은 유한하다. /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리고 삶은 시작과 끝의 사이다.

우리 주위에는 어디에서나,/ 삶을 사이에 두고 시작과 끝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 이것은 살아있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이다.

나무, 동물, 사람, 물고기, 풀, 심지어는 작은 곤충에게도,

영원한 삶은 누구에게도 해당되지 않는다.

삶의 길이만은 그것이 무엇이며, / 살아있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미국의 어린이에게 ‘죽음 교육’을 시키기 위한 글의 한 부분이다. 이렇게 어린이에게까지 삶의 철학, 삶의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남은 삶에 에너지를 쏟아, 의미 있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도한다는 것이다. 나도 어린 손자들에게 집에서 기른 동물이나 곤충들이 죽을 때마다, 함께 땅에 묻으면서 은연중에 이런 교육을 시키고 있다.

어느 무의탁 병사가 전사하면서, 한 움큼의 코스모스 씨앗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한다. 시신에서 몇 송이 코스모스가 피어나기를 바라는 청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를 기억하는 한 사람이라도 살아있다면 나는 죽지 않은 것이다. 다만 아름답게만 기억되기 바랄 뿐이다’ 이것이 그 무명용사의 진솔한 유언일지도 모른다. 천주교 대구 교구 교구청 안 성직자 묘역 입구에는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l)’라고 씌어있다고 한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충실하게 사는 것, 오늘의 삶과 내일의 죽음이 일치되는 그것을 깨닫는 것, 곧 죽음의 교육은 삶의 교육이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버나드 쇼(G. Bernard Shaw)의 묘비명이다. 중광(重光)스님의 묘비명은 ‘에이, 괜히 왔다’이다. 그들의 말 속에는 미스테리와 해학(諧謔) 이 있지만, 우리는 우물쭈물하다가 죽는다거나, 죽는 것이 후회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할 건 하고 가야지. 심경호는 ‘내면기행’ 저서에서, 1200~1900년대 지식인들이 남긴 자만(自輓=스스로의 죽음을 사색하며 지은 글)과 자명(自銘=자신의 무덤에 묻거나 무덤 앞에 세울 비명을 미리 적은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공감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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