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밥상에 준치를 올렸다. 육식을 좋아하는 서북(西北) 출신으로서 비린내 때문에 생선 종류는 좋아하지 않는데, 남편이 좋아하기 때문에 가끔 수산시장에서 이렇게 생선을 사 오곤 한다. 조리법은커녕 이름도 모른 생선을 어물전(魚物廛) 아줌마의 ‘맛 좋다’는 말만 듣고 사 온 것이다.
“이름이 뭐라더라? 뭐 준치라 하던가.....”
“전어 아냐?”
“준친지 전언지 참 맛있데....”
보아하니 준치 같았다.
“전어는 집 나간 며느리도 그 구운 냄새를 맡고 되돌아온다는데.... ”
딸내미가 누구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다. ‘가을 전어 머리에는 깨가 서 말’이란 말이 있듯이, 그만큼 맛 좋다는 전어.
“이건 준치야. 썩어도 준치란 말 못 들었어?”
그런데 준치와 전어는 헷갈린다. 생긴 게 비슷하기도 하지만 가시가 많고, 맛도 비슷해서 말이다. 우리말 큰 사전에 보면 전어(錢魚)가 있고 전어(箭魚)가 있어 또한 헷갈린다. 둘 다 청어(靑魚)과에 딸린 물고기인데, 전어(箭魚)가 곧 준치다. 딸내미가 말하는 건 전어(錢魚)이고, 아내가 사 온 것은 전어(箭魚)이다. 이름이야 어떻건 모두 맛있는 생선이다.
어렸을 적에 어른들은 ‘어’가 붙은 건 고급 생선이고, ‘치’가 붙은 건 하급 생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준치는 하급 종류에 속한 것이다. 고춧가루가 제사상에도 못 오른 것처럼, 비린내 나는 준치도 제사상에 오르지 못했는데, 병치와 준치가 병어․준어로 둔갑해서 제사상에 올랐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맛이 좋아 먹고 싶은데 잔 가시가 많아 몹시 불편했다. 어머니는 그냥 꼭꼭 씹어서 먹어도 괜찮다고 하면서, 혹시 목에 걸려 켁켁거리면, 포기 배추김치를 둘둘 감아 꿀컥 삼키라고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무사하게 내려갔다. 요즘 자녀들과 손자들에게 그렇게 해보라 하면 큰일 날 것처럼 손사래 하며, 아내조차 불안해서 마음 놓고 먹지를 못한다. 이 맛있는 생선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다니 행복 하나는 누리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준치가 원래 가시가 많았던 생선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큰 가시가 있는 생선-큰 것 작은 것, 푸른 것 붉은 생선을 따라다니며 가시를 달라고 졸라대어, 그 후 지금처럼 가시가 많게 되었는데, 그러나 염치가 있어 더 준다는 가시를 마다하고, 붙잡는 고기들을 뿌리치며 오던 길로 되돌아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백석(白石)의 동화시 ‘준치와 가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손자의 2학년 국어책에, ‘개구리네 한솥밥’ 이야기가 바로 백석의 글인데, 처음 대한 그의 글이다. 그 밖에도 ‘집게네 네 형제’‘오징어와 검복’등 생선에 관련된 동화시가 많은데, 평북(平北) 출신인 그가 생선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음은 뜻밖이다. 그는 월북 시인이 되어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인데, 1987년에 해금되어 그 글들의 일부가 비로소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으로서, 기생(妓生) 김영한과의 love story가 애달프면서도 아름답게 전해진다.
성북동의 길상사(吉祥寺)는 원래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내로라하는 정객들이 번질나게 드나들었던 곳인데, 이곳 인텔리 마담이 김영한이며 그의 애인이었던 백석을 기리어 이 대원각을 불교 교단에 기부, 길상사로 변모한 것이다. 길상은 그의 불교식 법명(法名)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본받아, 평생 모은 재산을 쾌척(快擲)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김수한 추기경도 이 자리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고 한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구나. 백석의 시 ‘준치 가시’ 마지막 연에
~준치를 먹을 때엔/ 나물지 말자.
가시가 많다고 / 나물지 말자.
크고 작은 고기들이 / 아름다운 마음인 준치 가시를
나물지 말자.
라고 했다. ‘썩어도 준치. 물러도 준치. 죽어도 생치’ 이렇게 찬사가 많은 준치를 생각하니 입속에 군침이 도는구나. 난 남도(南道) 출신이라 해산물은 다 좋아한다. 특히 준치회의 감칠맛을 무어라 표현하랴.
시어다골(鰣魚多骨)이란 말이 있다. 시(鰣) 자가 ‘준치 시’이다. 그러니까 준치는 맛은 있으나 가시가 많다는 뜻이다. 즉 좋은 일의 한편에는 불편한 일이 많음을 이르는 말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뜻과 서로 통하는 말이다. 우리네 삶 속에 시어다골이 얼마나 많은가? 어렸을 적 시골에서 대사 끝에, 집 안에서나 문중에서 갈등이 생기고 의견 충돌이 일어나 대판 싸우는 일을 흔히 보았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교회에서도 새로 믿거나, 은혜받거나, 직분을 맡거나 할 때 원치 않고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되면, 누구나 왜 그러냐고 의문을 갖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생동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고양이가 썩어서 냄새나는 생선을 노리는 게 아니고, 살아서 팔딱거리는 생선을 노리지 않느냐면서, 예수의 새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생동하고 있으므로 마귀가 시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때 정신 바짝 차려 쉬지 말고 기도하며 말씀으로 무장하라고 권한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마 12:43~45)고 하였다. 곧 호사다마가 아닌가?
아름다운 장미꽃에 웬 가시가 많으냐고 짜증 낼 게 아니라, 앙상한 가시 속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필 수 있느냐고 긍정적으로 감동하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 맛있는 생선인데 웬 가시가 이렇게 많으냐고 불평할 게 아니라, 이렇게 가시는 앙상해도 맛은 그만이네 하고 준치를 치켜세우면, 그 식탁은 복된 식탁이 되고 우리의 생활이 풍요롭고 윤택하게 될 것이다.
가시 채 씹어 맛있게 먹고 나니 내 밥그릇 주위는 깨끗하다. 가시와 싸우면서 어쩔 수 없이 먹어주는 아내의 밥그릇 옆에는 잔 가시가 수북하구나. 맛이 좋았을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