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길 1 02화

산타할아버지

by 최연수

몽고 술을 먹고 온다고 하는 /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매우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 많은 선물을 놓고 가네.

해방 이듬해였으니까 60여 년 전 이야기다. 7 살 아래 동생에게 이 노래를 배웠다. 그는 6살이었는데, 교회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자 이런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로 보아서는 먼 나라 몽고에서 술을 마시고 오는 할아버지였다. 그래서 얼굴도 불그스름하고 옷차림도 빨간 걸로 생각했다. ‘먼 곳으로부터 온다고 하는....’ 노랫말이 어린 그에게 그렇게 들렸던 것이리라.

그 후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교회 다닌 아이들이 몹시 부러웠다. 간밤에 산타가 머리맡에 놓고 간 선물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이, 꼬마 천사처럼 보였다.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착한 일만 하면, 저 굴뚝을 타고 몰래 들어와 알사탕 몇 개라도 놓고 가지 않았을까, 눈을 비비며 머리맡을 둘러보곤 했다. 어느 누구로부터 변변한 선물 하나 받아본 적 없이 자란 나는, 철딱서니 없게 그런 꿈을 꾸었다. 그것이 헛된 꿈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눈썹이 희어진다는 바람에, 섣달 그믐날 밤잠을 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 하다가 끝끝내 곯아떨어졌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머쓱하게 거울 앞에 서서, 눈썹을 살피고 안도의 한숨을 쉬곤 했다. 부엌에서 그 집안 식구의 언행을 연중 지켜보고 잘잘못을 치부했다가, 동짓달 굴뚝 타고 상천, 옥황상제에게 고하고 이듬해 운수를 타고 그믐날 돌아오는 조왕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이 조왕님이 사주팔자에 찍는 일곱 가지를 생각해보곤 했는데, 서양판 조왕님이 곧 산타 할아버지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 후 19살 터울로 막내 동생이 태어났다. 집에서 불이 난 바람에 빈손으로 온 식구가 서울로 왔다. 손바닥만 한 한 칸 방에서 다섯 식구가 굶지는 않았으나 옹색하게 살았다. 그에게 변변한 선물 하나 사주었으랴. 그런데 믿지 않은 가정이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이 길거리에 출렁거리자, 7 살 난 막내는 들뜨기 시작했다. 선물은 마련했으나 골려주려고 머리맡에 놓지는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두리번거리던 그는 울상이었다. 다른 식구들에게는 선물이 놓여있는데.....

“말을 잘 안 듣고, 심부름을 잘 안 하니까 그렇지... ”

“시, 산타 잡아다 구워 먹을 거야!”

그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식식거렸다. 감춰둔 새 잠바를 입혀주고, 과자를 주어 달랬지만, 잠깐이나마 얼마나 실망하고 분통이 터졌을까?


크리스마스이브에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전 세계를 돌며,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을 준다는 산타클로스(Santa Claus).

로마 시대 말기 B.C. 4세기, 터키 영토인 아나톨리아의 미라(Myra)라는 곳의 주교였던 니콜라스 성인.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풍성한 선물을 주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곤궁했던 어느 기독교인의 세 딸들에게 지참금을 마련해주어, 그들이 창녀가 되지 않고 행복하게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의 신터클라스(Sinterklaas=니콜라스 성인)다. 네덜란드에서는 12월 5일이 ‘니콜라스 성인의 밤’인데, 저녁에는 선물을 받기 위해 아이들이 난로 옆에 신발을 걸어둔다. 착한 아이에게는 선물을 놓고 가지만, 나쁜 아이들에게는 흑인 조수인 ‘시커먼 피트=Zwarte Piet’가 막대기로 때려주고 간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산타클로스는, 아마도 미국의 영화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19세기 말 만화 작가 토머스 내스트(Thomas Nast)는 통통한 몸매에 불그스름한 뺨, 그리고 덥수룩하게 흰 수염을 늘어뜨린 할아버지를 캐릭터로 만들었다. 한편 1939년 로버트 메이(Robert May)는 통신 판매 백화점의 선전 스토리로, 빨간 코를 가진 루돌프를 만들어 내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원래 기독교와는 관련 없는 이 이야기인데, TV와 영화 광고 등을 통해서 성탄절을 과소비 혹은 과소 소비의 ‘쇼 비즈니스’로 변질시켰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아무튼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산타는 푸짐한 선물을 갖다 주는 할아버지로, 아이들의 마음속에 꿈으로 깊이 자리 잡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그들 가슴들을 풍선처럼 부풀게 하고 있다.

그 후 크리스천이 되어 세 아이를 기르면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의례 아이들 선물 준비하는 일에 바빴는데,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으면서, 누구에게 어떤 선물을 주었는지 기억조차 어렴풋하다. 그리고 그들이 몇 살 때부터 산타 이야기가 한낱 전설이요, 그 꿈이 정말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바렌타이 데이를 비롯해서 화이트 데이, 빼빼로 데이..... 산타를 일찍이 졸업한 젊은이들은 어느 무렵부터인지 연인들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새로운 꿈을 익혀가고 있다. 그들은 가공의 인물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어린이들이 우습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을 다 잊었다면 제아무리 고급스러운 꿈을 새로 꾼다한들 결코 행복하진 않다.

‘우리도 다 알아. 그래도 선물 받지 않아?’

하며 그들 상투 꼭대기에 앉아 있는 어린이들이 그들보다 훨씬 어른답다. 속고 속이는 세상에 속아주는 것이 얼마나 지혜롭고 여유로운가?


나는 몇 년째 교회에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김없이 산타 할아버지가 된다. 큰 손자가 5 살 때 이야기이다. 그는 선교원에 다니고 있었다. 친구들이랑 산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흰 눈이 펄펄 썰매 달린다. / 바람 헤치며 썰매는 달린다.

방울 소리에 맞춰 부르는 / 노래도 즐겁구나 썰매 달린다.

댕그랑 댕그랑.......

산타는 선물 자루를 짊어지고 선교원에 나타났다. 기린처럼 목을 길게 빼고, 마른침을 삼키며 기다리던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들! 천국에는 이런 아이들이라야 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속아주는 사람이 가는 것인가? 아니면 속이는 사람이 가는 것인가? 그런데 이 아이들 가운데 산타 머리 꼭대기에 걸터앉아, 거짓 산타가 나타났다고 입을 삐쭉거리고 있지 않을까? 그런 아이들은 가지 못하는가? 헷갈린다. 어쨌건 들통나지나 않을까 잔뜩 긴장한 산타는 손자를 찾았다.

‘저 녀석, 설마 속고 있겠지.....’

이름을 불렀다. 나오는 모습이 속은 것이 분명했다. 입술에 침을 바르며 뻔뻔하게 덕담을 늘어놓았다. 칭찬도 했다가, 약점도 건드려 보았다가... 사진도 찍고 선물을 받고 싱글벙글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니 속은 게 분명했다.

“산타 안녕! 내년에 또 오셔요!”

해맑은 웃음을 등에 업고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문을 걸어 잠그고.

“아버지, 들켰어요. 산타가 아니고 할아버지였데요....”

“뭐?”

아범의 전화를 받고 나는 까무러칠 뻔했다. 삐죽이 나온 옷소매와 얼굴 피부를 보니까 할아버지였다는 것이다. 잘못 봤다고 해도 틀림없는 할아버지였다고 단정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아는 척하지 않았느냐고 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했다니, 속아 주어야 한다는 이치를 벌써 깨달았다는 말인가?

1년 후 또다시 산타가 되어 나타났는데, 이젠 할아버지의 미숙한 연기를 채점하면서, 친구들에게 제 할아버지라고 귓속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빠, 이제 하지 마세요. 아이들 꿈을 앗아가잖아요.”

딸내미의 말. 아닌 게 아니라 손자의 저 눈처럼 하얀 꿈을 내가 앗아갔을까?


그로부터 1년 후, 또다시 산타가 되어 선교원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작은 손자 차례가 되었다.

“그만하라니깐.... 그렇게 할 사람이 없어서 또 해요?”

“................”

이번에는 절대로 들통나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변장과 변성.... 완벽하게 준비했다. 3년간 뮤지컬과 연극, 영화까지 출연한 나인데, 너덧 살 꼬마 아이들 쯤 못 속인단 말이냐. 자신 있게 캐럴을 부르며 등장. 귀여운 얼굴들, 빛나는 눈망울들.... 이들을 또 속여야 하는 것이다. 둘러보니 요 녀석이 자라목을 빼고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착한 어린이들에게만 선물을 준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아이들.

‘요 녀석들 봐라.’

김치 안 먹는 아이, 할아버지 말씀 잘 안 듣는 아이, 엄마 아빠에게 떼를 쓰는 아이, 엄마로부터 안 떨어지려는 아이.... 요 녀석의 어깨가 처지고, 앞사람 등 뒤로 얼굴을 살짝 감추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옳지, 이만하면 됐다!’

아이들 이름을 차례차례 부르는데, 몸이 달았을 것이다. 드디어 제 이름을 부르니까 머뭇거리지 않고 나왔다.

‘설마 눈치 채지 못했겠지’

자기에 걸맞지 않은 칭찬을 해도 얼굴 하나 붉히지 않은 녀석. 선물

을 받아 들고 떳떳하게 들어가는 모습이 뻔뻔스럽다.

“엄마, 오늘 할아버지가 산타 되었다!”

“아니야, 진짜 산타 할아버지야.”

“할아버지가 변장하고, 목소리도 다르게 했는 걸.”

“할아버지 닮은 산타도 있어.”

“아냐, 할아버지 맞아, 그런데 루돌프 사슴이 안 왔어.”

“.................”

스쿨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엄마에게 그렇게 말하더란다.

아, 또 들통났구나! 내 연기가 그렇게 허술하다는 말인가? 이제 4돌 지난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능청스럽게 속아준다는 말인가? 연기는 오히려 그가 능숙하게 한 것이다. 뒤로 슬쩍 다가와서

“할아버지 맞지?”

이 한 마디라도 건넸다면 차라리 귀여웠을 텐데, 그렇게 시치미 떼고 엄마에게 속 마음을 털어놓았다는 것이 얄밉기 짝이 없다.

“아빠, 내가 뭐랬어. 아이들 꿈 앗아가지 말라 했잖아? 얼마나 불쌍해.”

평생을 지니고 살아도 아름다울 꿈인데, 빼앗겼는지 잃었는지, 할아버지 때문에 너무 일찍이 그 꿈이 사라졌다면, 내가 죄인이구나!

고아원을 방문하러 떠나는 한 무리의 산타가 손을 흔들고, 젊은 여자 산타가 상품 광고를 하며, 심지어 산타가 절도를 했다는 TV 뉴스를 안방에서 접하면서 닳고 닳은 아이들인데, 진짜 산타를 믿고 기다리며 인큐베타(incubator)에 누워있는 미숙아가 요즘 어디 있다는 말인가? 속아주는 명분(名分)을 세워주는 대신 선물이라는 실리(實利)를 챙기면 그만인 아이들 앞에서, 들통날까 봐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할아버지가 오히려 순진하지.

정보가 홍수처럼 범람하는 세대가 되어, 허구와 사실을 꿰뚫고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속일 수 있을까? 호락호락하지 않은 이런 아이들에게 어떤 동화를 써서 읽혀야 감동할 것이며, 아카데미 주연상이라도 받은 배우라야 산타 역을 맡겨야 한다는 말인가?

어디서 무엇을 보나 속이고 속아주는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 같다. 영악스러운 아이들이 이런 세상 이치를 이미 뻔히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속는 것이 톱니바퀴를 잘 돌리는 윤활유 인지도 모르겠다. 핏대를 세워 밝히고 따져 보았자 너 죽고 나 죽는 판국에 말이다.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체해주는 것이야 말로 funny가 아닐까? 또 손녀 하나가 자라고 있다. 내가 더 산다면 모두가 뻔히 아는 funny 연극을 또 해야 할지도 모른다. 속더라도 또 산타가 되고 싶은 할아버지의 동심에다 찬물을 끼얹지 말기를.

그땐 네 오빠들처럼 funny 알아도 속아주렴.

“우리 할아버지다!”

하고 뛰어나오면 난 망신이야. 그래야 할아버지 일감도 줄지 않고, 세상이 재미있지 않겠니?


100여 년 전 미국 버지니아라는 소녀의 이야기다. “기자님, 전 여덟 살인데요, 꼭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가르쳐 주세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참말로 있는 거예요?”하고 묻는 투서가 미국 뉴욕 어느 신문사에 왔다. 묵살해버림직한 흔한 질문 아닌가? 그런데 이 신문은 정성스럽게 사설을 통해서 “산타클로스가 오신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있고, 남을 위한 배려가 있으며, 서로가 믿고 살 수 있는 한 산타클로스는 분명히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서로 믿으니까 속아주는 것이 아닌가?

이제 일곱 살이 된 둘째 손자가 어느 날 대뜸

“할아버지, 등산을 제일 잘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

요 녀석 봐라. 다 컸다고 난센스 퀴즈를 풀라고 한다. 잘난 체 하는 할아버지를 골리려는 속셈이 뻔하다.

“산타 할아버지지. 산을 잘 타니까....”

맞다. 이렇게 되면 손자가 산타 할아버지로 분장하고, 할아버지는 선물을 받아야 할 것 같다.


핀란드에 로바니에미라는 도시 외곽에 산타마을이 있고, ‘Santa is here’라는 간판이 붙은 산타 오피스가 있다고 한다. 이곳을 방문하면 산타를 뵙게 되는데, 한 명이 아니란다. 어느 기업에서 운영하는데, 산타가 산다는 코르반튼투리山으로 편지를 보내면, 어느 우체국 직원이 답당을 해준 것이 산타 전설이 현실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납된 편지가 지금까지 1600만 통이요, 작년 한 해 동안에도 55만 통이 배달되었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이곳 산타 우체국에 7유로를 내고 주소를 남기면, 크리스마스에 산타의 편지와 달력을 받을 수가 있다. 한편 이 편지 끝에는 ‘꼭 산타를 만나러 여기에 오라’고 끝맺는데, 이 전설로 매년 60만 명의 관광객이 이 도시에서 하룻밤을 묵는다고 한다.

사람은 이렇게 알고도 속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심이 돌아갈 곳이 어디 있겠으며, 어찌 사람 살 맛이 있을 것인가?

keyword
이전 01화맛보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