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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길 1 01화

맛보기 글

수필집 '길'을 시작함에 앞서

by 최연수

아무런 격식 없이 붓 가는 대로 쓴다는 것이 얼마나 홀가분한가? 느끼고 생각하며 겪은 일들을 그때그때 붓을 따라가며 쓰는 글을 수필이라고 한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수필을 공부하면서, 문학의 한 장르인 수필이 나의 체격에 알맞은 옷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내 나름대로 마름질해서 옷을 맞추어 입어보았다. 때마침 김용준의 "근원 수필(近園 隨筆)"을 읽게 되면서 그 매력에 끌리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엔 대학 노트에 붓을 따라 맘껏 끄적거려 보았고, 청년 시절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에 '상화집(想華集)' '교단(敎檀)'이런 옷을 스스로 맞추어 입었다. 언젠가는 출판해서 패션쇼에 나가보자는 생각도 했으나, 한눈파는 사이 이 옷가지들이 흐지부지 사라져 버렸다.


요즘은 신문ㆍ잡지에 실린 칼럼에 입맛이 젖었다. 짧은 글 속에 담긴 긴 생각과 감칠맛이 좋다. 나도 이런 음식을 조리해 보고 싶어, 틈틈이 주방에 들락거렸다. 팔순 고개를 오르면서 문득 쉰 음식을 냉장고에 넣고 있지 않나 해서 쓰레기통에 버릴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런 음식 쓰레기도 맛있게 먹고 살찌는 동물이 있다는 생각에 주춤했다.


괴테는 시신(詩神) 뮤즈는 젊은 시인의 천진무구함도 즐기지만, 노 시인의 신중한 현명함도 좋아한다고 했다. 헤밍웨이는 단편 '노인과 바다'에서 '머리가 허옇고 수척하지만 두 눈만큼은 바다 빛깔이고 쾌활함과 불굴의 의지로 빛난다'라고 늙은 어부를 묘사했다. 인생 황혼기를 황금빛으로 물들인 문인이 얼마나 많은가? 곰삭은 옷가지는 헤어지지 쉽지만, 곰삭은 음식은 씹을수록 맛있지 않은가?


그래 버리지 말고 밥상에 올려보자. 해서 그릇에 담아본 것이 이 수필집 '길'이다. 보다 정갈하게 차려보자고 그림을 끼어 넣었다. 한국화를 그려보고 싶어 팔순에 그린 것이라 습작이요 졸작임을 말할 나위 없다. 수묵화의 기본 기법도 아직 습득하지 못해 치기(稚氣)의 먹물이 입맛을 떨어지게 할 수 있겠다. 음식 투정하다가 밥상을 둘러엎는다면 나는 어이하랴.


이 밥상을 차리느라고 애쓴 내 아들 며늘아기 고맙다.


2015.1.6(음 11.16) 팔순을 맞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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