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돛대만 높게 달아주면
둥둥 떠다닐 것만 같다.
옛날의 동시 ‘섬’은 바로 이 가막섬을 소재(素材)로 지은 것이다. 떠나 온지 60여 년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지만, 내 눈 망막(網膜)에 그림자처럼 새겨진 이 섬은 또 하나의 내 고향이다. 언제인가 이 섬이 T.V 화면에 잠깐 비추었는데, 내 눈에 남아있는 그 그림자와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았는지... 이 섬은 남쪽으로 손에 잡힐 듯 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인데, 썰물 때면 갯바닥이 드러났고, 동네 아이들을 따라서 개펄에 빠지며 두어 번 가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때도 숲이 짙었으며 무슨 열매였는지 맛있게 따먹었다. 그런데 지난 1981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컬러 시리즈’에 바로 이 가막섬이 소개되었다. 정다웠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그리웠던 옛 고향을 찾아간 듯 얼마나 반가웠는지, 가위로 오려서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원시(原始)가 출렁이는 바다 위의 ‘나무 백화점(百貨店)’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섬은 ‘까막섬’이라고도 불리는데, 마량리에서 약 500m 거리에 있으며, 4,380평의 넓이에 60여종 이상의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고 했다. 이 섬 너머 아스라하게 보이던 섬은 고금도(古今島)라 했고, 한참 더 가면 완도(莞島)라고 했다. 나는 이런 섬들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이 작은 포구에서 자랐다. 썰물이 나가기가 바쁘게 어머니를 따라 개펄로 나가 호미로 바지락을 캤으며 게도 잡았다. 밀물을 따라 고깃배들이 돌아오면 우리 조무래기들은 선창(船艙) 가에 기다렸다가 생선 한 마리씩 얻어 가지고 집으로 뛰어왔다. 그 날은 맛있는 생선찌개를 먹을 수 있는 날이라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꿈도 낭만도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지. 어느 날은 썰물을 미쳐 따라가지 못하고 개펄에서 퍼드덕거리는 바닷가재 한 마리를 잡았다. 내 두 손 합친 것보다도 훨씬 커서, 어머니의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
갯가 시헌네 집 축대 아래는 모래톱이었다. 앙증맞은 새끼 게와 조가비를 가지고 물새와 함께 술래잡기를 하면서 발자국을 남기면, 이내 바닷물이 지워버리곤 했다. 심술이었을까? 귀여워서였을까? 그런데 어느 날 우연(偶然)히 축대 밑에서 개를 잡는 광경을 보았다. 장대에 거꾸로 매달려 버둥거리면서 모닥불에 그을려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찌나 놀랍고 불쌍했는지 울상으로 도망치듯이 뛰어왔다. 게다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은 어부(漁夫)가 이 곳에 돌베개를 베고 거적에 덮여있는 광경을 또 보았다. 덮여 있었으나 시체(屍體)를 보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꽃상여도 아닌 가마니 들것에 실려 황토(黃土)길을 따라 황천(黃泉)으로 올라갔다. 가랑비에 옷이 젖은 것도 모르고, 유가족들의 곡하는 소리에 함께 눈물지으며 나도 따라갔다가 아버지로부터 호통을 받기도 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즐거운 놀이터를 잃어버렸다. 실낙원(失樂園)인 셈이다. 무슨 사연 때문인지는 모르되 또 이웃 집 아주머니가 양잿물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는 가엾은 소문을 듣고, 또 콧날이 시큰거렸다.
아무튼 죽음이 싫었다. 슬픔이 싫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눈에서 이따금 눈물을 보았다. 물레를 돌리며 실을 잣거나, 허벅다리에다 삼베 껍질을 비벼 실을 뽑을 때는 어김없이 남도(南道) 판소리를 흥얼거리다가 곧잘 눈물을 글썽이곤 했는데, 그 흐느끼는 듯한 서편제(西便制) 판소리는 늘 내 마음까지도 구슬프게 했다. 그래서 어머니의 입을 틀어막으며 왜 우느냐고 다그치면
“심청이가 불쌍해서 그란다.”
“춘향이가 불쌍해서 그란다.”
고 했다. 옛날얘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대개는 심청전이나 춘향전 아니면 흥부전이었는데,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거나, 춘향이가 감옥 안에서 메를 맞는 장면이 나올 때쯤이면, 어머니는 벌써부터 눈시울이 붉어지고, 나는 울지 말라고 어머니를 꼬집곤 했다. 그러나 가슴 속에 맺힌 한(恨)을 그렇게 실오리로 풀어내는 카타르시스(katharsis)이었을 것이다. 그 한이 무엇이었을까? 물론 어린 내가 알 리가 없었다. 장성해서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2살 위의 아내(海州 吳氏 1908-1932.음2.2)를 저승으로 보내고 홀로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이렇게 아내를 잃은 아버지에게 후처(後妻)로 시집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2대에 걸쳐 상처(喪妻)한 집안이요, 게다가 시할머니를 비롯해서 네 명의 시동생과 세 명의 시누이가 있는 대가족이었다니, 그 시집살이가 얼마나 힘겹고 고달팠으랴.
아버지도 명창(名唱) 임방울(임승근)을 좋아했고, ‘춘향가’ 중에서 특히 ‘쑥대머리’와 전라도 민요 ‘육자배기’를 곧잘 흥얼거렸다. 어린 나는 그 가락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나도 나이 들어 곧잘 흥얼거리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1935년이면 이태리가 에디오피아를 쳐들어가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났다. 1938년에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쳐서 합치고, 1939년에는 독일이 영국. 프랑스에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하였다. 그러니까 제2차세계대전이 바야흐로 불붙기 시작한 때였다. 이렇게 세상이 뒤숭숭한데다가 도망치다시피 세간나와 가난에 쪼들린 때였으므로, 아버지 어머니는 가끔 신세타령(身世打令)을 판소리로 흥얼거렸던 것 같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축대 위에 덩그렇게 서있었는데, 세찬 바닷바람이 불면 양철 지붕이 덜커덩거렸다. 방, 부엌, 마루 각각 한 칸인 작은 집이었다. 내 생일 날, 모처럼 딸네 집에 다니러 오신 외할아버지(趙東來)께서 내 미역국을 다 잡수신다고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니, 어촌에서 살면서도 그 흔한 미역국조차 마음껏 먹지 못했던 것일까? 그 때 외할아버지는 닭 한 쌍을 가져와 기르라고 하셨다. 나는 대뜸 크고 우람한 수탉을 갖겠다고 했으나 누나는 작은 암탉을 갖겠다고 했다. 나중에 보니 암탉은 알을 낳았으나 수탉은 그렇지 못하여 어찌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약삭빠르지 못하고, 욕심 없기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다.
모래톱 놀이터를 잃고 뒤란(뒤뜰) 모퉁이에서 누나와 소꿉놀이를 잘 했다. 울타리에서 자라는 깩살(각시풀)을 뜯어다가 소금을 넣고 비비면 아주 연해졌다. 이것을 수수깡에 묶어서 머리를 만들면 인형(人形)이 되었다. 댕기를 땋기도 하고, 낭자(쪽)에 성냥개비 비녀를 꽂으면 각시가 되었다. 주로 서방(신랑) 각시(신부) 맞절을 시키는 혼인잔치를 했는데, 진흙을 빚어서 잔치 음식을 차렸다. 그런데 그 강낭콩알 만한 흙덩이 한 개를 먹는답시고 냠냠 입에 넣었다가 그만 목구멍으로 넘어가버렸으니, 곧 죽는 줄 알고 말도 못한 채 얼마나 겁을 집어먹었는지....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의 서랍에서 조그만 대롱을 꺼내어 만지는데 마개를 여니 뭔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방바닥에 쏟아진 것은 깨알처럼 아주 작은 은빛 나는 구슬이었는데, 만지면 잡히지 않고 오히려 도망가서 마치 살아있는 벌레 같았다. 빗자루로 쓸어 담으려 하였으나 자꾸만 빠져나가고 더 작게 부서지며 숨어버리는 게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반질반질한 장판 바닥이 아니고 죽석이었기 때문이다. 죽석(竹席)이란 대오리로 엮은 넓은 방석이다. 그 틈새로 숨어버린 그 구슬이 얼마나 얄미운지. 겁이 덜컥 났다. 물론 아버지로부터 큰 야단을 맞았다. 후에 안 것인데 바로 수은(水銀)이었다.
어머니는 가위로 머리를 깎아주곤 하였다. 쥐가 쏠듯이 들쭉날쭉 깎았다. 그나마 자주 깎지를 못해서 남바위 머리라고 놀림을 받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이끌리어 이발소(理髮所)에 갔다. 무서워서 안 가겠노라고 떼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아버지는 나만 이발사에게 맡겨 놓고 가버렸다. 서슬이 퍼런 면도와 가위들이 즐비한 큰 체경(體鏡) 앞에 덩그렇게 앉아있는 내 모습에 내가 질려 오들오들 떨었다. 이윽고 이발사는 바리캉(bariquant 프)을 대더니 머리 한 가운데다 신작로(新作路)를 내놓고, 다 깎았으니까 이제 나가라는 것이다. 대머리나 *사무라이 같은 모습이 보기에도 너무 흉측해서 마구 울었더니, 울음을 그치지 않고, 어른들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이발소 앞 수양버들 나무에다가 또 묶어놓은 것이 아닌가? 어른들은 재미있어서 웃어대었겠으나, 나는 머리를 깎은 게 아니고 가슴을 깎아낸 듯 참으로 놀랍고도 무서웠다.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부엌에서 엿들으니 어머니께서 나를 떼어놓고 누나만을 데리고 사진을 찍으러 간다는 것이다. 나는 순간 까무러칠 뻔하였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도 따라가겠다고 앞장섰다. 누나는 얄밉게 웃기만 하고 어머니는 거짓말이라고 어르고 달래었으나 귀를 틀어막고 앞장 서 걸어갔다. 눈물로 얼룩진 그 얼굴을 씻지도 못한 채 뒷동산에 올라가 사진을 찍었는데, 난생처음 찍어본 사진이었다. 아버지는 옷고름을 늘어뜨린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누나를 앞세웠으며, 어머니는 *개씹단추를 한 희저고리에, *ちりめん(지리맹=縮緬)이라는 검정 치마 차림이었다. 요즘 깔깔이 같은 천이었는데, 숯 다리미질을 하면 늘어났다가 빨면 바짝 줄어드는 신기한 천이었다. 어머니는 이 치마를 가장 아꼈다. 나는 만삭된 어머니 치맛자락 앞에서, 잔뜩 긴장한 채 두 손을 쫙 펴고 새까만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서 있었다. 어린 시절 오직 한 장 찍힌 그 때의 사진은 오랫동안 액자에 넣어진 채 벽에 걸려, 보는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곤 했는데, 1949년 화재(火災) 때 아깝게도 타져버렸다.
바닷가 바위 위에 붙어 있다가,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팔딱팔딱 물속에 뛰어든 망둥이 또는 짱뚱이라는 못생긴 물고기가 있다. 내 눈이 유난히 크고 잘 뛰어다닌다고 해서 내 별명을 ‘짱뚱이’로 부른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놀이터가 동산으로 바뀌었다. 산딸기를 따먹으며,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았다. 동산은 찔레와 작은 대나무가 많았는데, 잘 못해서 대나무 가시가 오른 쪽 손등에 박혀, 한 동안 혹처럼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장흥읍으로 이사 와서 이것을 수술하여 그 흉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이것이 첫 병원(病院) 출입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한참 가면 해태(海苔=김)조합 이사(理事)라는 사람의 집이 있었다. 아담한 기와집에 넓은 뜰이 있었고, 텃밭에는 갖가지 채소들이 많았다. 뜰 한쪽에는 포도나무가 있었는데, 주렁주렁 열린 그 포도송이가 얼마나 탐스럽고 신기했는지...이 포도나무 그늘 아래다 둥그런 돗자리를 깔아놓고 누나는 그 집 아이와 소꿉놀이를 잘 했다. 익어 가는 포도 냄새를 맡고, 가끔 한 알 두 알 따먹으면서 그 집에서 노는 건 그야말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아닌 무릉포원(武陵葡源)의 신선(神仙)놀이였다. 그런데 누나는 곧잘 나를 따돌리고 혼자만 갈 때가 많아서 울기도 많이 했다.
우리 집 축대 아래는 창고가 있었고, 그 창고에는 도둑고양이가 살고 있었다. 그 고양이가 어찌나 예쁘고 귀여운지 잡아다가 키우고 싶었다. 도둑고양이는 꼬리가 길고, 집 고양이는 짧다고 했는데, 잡아다가 꼬리를 자르고 목에다가 예쁜 방울을 달면 집 고양이가 될 게 아니냐고 어머니를 졸랐으나 어머니는
“ 이놈아, 밤에 잘 때 니 뽕알 따가...”
하면서 핀잔을 주었다. 그런데 그 집 딸아이가 앞을 못 보는 봉사(맹인)였다. 영문도 모르는 나는 가끔 눈을 크게 떠보라고 했다. 그런데도 지팡이를 짚고 길을 잘 다니는 것이 참 신기하기만 했다. 왜 봉사가 되었느냐고 어머니께 여쭈어보면, 아버지 어머니 말을 잘 안 들어서 그랬노라고 대답했다. 그럼 심봉사도 부모님 말을 잘 안 들어서 그랬느냐고 되물으면 어머니는 얼버무렸다. * *
2001년 3월 1일, 60여 년 만에 여행하는 도중 마량리를 잠깐 들렀다. 오늘날 대구면 일대가 고려청자 도요지(陶窯地)였다는 것이 알려져 유명해졌지만, 가막섬과 고금도만 옛 기억대로일 뿐 그 조용하고 작았던 어촌 마량리가 흥청거리는 큰 면(面)으로 변해서, 정겹다기보다는 차가운 날씨 때문인지 오히려 을씨년스러웠다. 그 때 고금도와 연결하는 교각(橋脚)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2007년 6월 30일 완공 개통(開通)되었다는 보도다.
*사무라이(さむらい)....일본의 무사(武士)로서 머리 한 가운데를 밀어버린 차림이었음.
*개씹단추....헝겁 오리를 좁게 접어 감친 뒤에, 여자의 쪽진 머리 모양 비슷하게 만든 단추.
*ちりめん(지리맹=縮緬)....견직물의 한 가지로, 바탕이 오글쪼글한 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