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길인지 논둑인지
온통 희게 묻혀버린 들녘.
한숨을 눈 위에 밟고
내리는 눈발은 발자국을 덮고.
쌓이는 눈은 앞길을 가리고.
무슨 영화(映畵)의 한 장면이나 시(詩)의 한 구절(句節) 같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그 해가 1935년 을해(乙亥)년. 음력 동짓달인데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왔노라고 어머니는 돌이켜 생각하곤 했다. 전남 장성(長城)읍 사거리에서 잠깐 사셨다가, 다시 전남 강진군 대구면(康津郡 大口面)으로 이사 와서 임신(姙娠)했는데, 아기 낳을 날이 가까워지자 어머니는 강진군 칠량면 송촌(七良面 松汀里 松村 마을) 친정으로 오셨다. 세 살짜리 딸을 아빠에게 맡겨 놓고, 스물을 막 넘은 어머니는 무거운 몸을 스스로 부축하면서 길을 떠났다. 달구지조차 지나갈 리 없었을 테니, 아마도 십여리 길을 넉넉히 걸었으리라. 눈물과 한숨을 자늑자늑 씹어 삼키며....
동지(冬至)를 열흘 앞둔 음력 동짓달 열엿새(양력 12월11일). 해가 막 떨어져 바늘 귀 꿰기조차 힘들어, 관솔불을 켜놓고 탯줄을 잘랐다니까, 산 그림자도 사라진 오후 6시쯤이었을 것이다. 그 때 아기는 25세인 아버지 최종민(崔鍾敏)과 21세인 어머니 조화임(趙点順→和臨) 사이에서 누나와 두 살 터울로 태어났다. 굳이 뿌리를 캐자면 통천최씨(通川崔氏)의
시조(始祖)인 최경현(崔景賢=고려 정종 때의 政議大夫,監察御使)의 25세손,
중시조(中始祖)인 최녹(崔祿=고려 충렬왕 때 護軍)의 19세손,
칠량파(七良派) 최영대(崔永大)의 6세손,
동렬공파(東烈公派) 최동렬(崔東烈)의 손
그런데 고고(呱呱)의 소리로 떳떳하게 이 세상에 출생신고도 안 했다니, 죽은 아이가 태어난 줄 알았노라고 해산바라지 했던 외할머니는 그 때 일을 더듬어 말씀하곤 했다. 요즘처럼 태어나자마자 먼저 발자국 도장을 찍어놓았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빨간 고추와 검정 숯을 새끼줄에 꽂아, 아들 낳았노라고 자랑스럽게 문간에 금줄을 메달아 놓았을 것이다. 자른 탯줄을 마을 앞 개울가 언덕에 묻었다면서, 외할머니는
“여그가 니 안태 고향이다.”
고 말씀하셨다. 탯자리인 안태(安胎) 고향! 그래서 나는 고향 하나가 더 보태졌다. 그 무렵 외가는 소작농(小作農)을 짓던 가난한 농가였는데, 그 이듬해 또 외숙께서도 맏아들을 낳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에 맏손자가 태어났으니 ‘오지다’고 ‘오진이’라 불렀다. *용왕수 떠놓고 동쪽 헤를 향해 손을 비비며 치성을 드렸을까? 외손자와 친손자를 함께 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쁨은 어떠했으랴. 한편 기쁨과 더불어 바쁜 집안이 더욱 어수선했을 것이다. 우리 내외사촌은 쌍동이처럼 막내 이모의 등이 휘어질 정도로, 번갈아 업혀 얼마동안 자랐다고 한다.
친할아버지는 송촌과 마주 보는 단월리(丹月里 목암마을)에서 사셨는데, 두 번이나 연거푸 상처(喪妻)한 데다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맏아들까지 상처를 하게 되면서 집안이 기울자, 세번째의 젊은 아내와 함께 강진군 병영면 지로리(康津郡 兵營面 枳路里)로 이사하여 한약방
(漢藥房)을 차려 새 살림을 시작하셨다. 할아버지는 한학(漢學)은 많이 공부하셨고, 특히 붓글
씨는 달필(達筆)이었는데, 완고(頑固)한 편이었다. 뱀 허물 같다며 가죽 허리띠를 못 띠게 하시고, 댕기를 앞에 매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넥타이(necktie)를 못 매게 하시며, 심지어 치분(齒紛)으로 이를 닦지 못 하도록 하셨다고 한다. 조부님은 최씨(崔氏) 종가(宗家)의 종손(宗孫)이 태어났는데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다는데, 그렇게 별난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위로는 부모를 아래로는 예닐곱이나 되는 식솔(食率)들을 거닐어야 하였으니, 그 버거움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表現)할 수 있으랴.
이렇게 무너져 내린 집 기둥에 깔려서 헐떡거리며 스무고개를 막 넘어선 아버지는, 종가(宗家)를 지키라는 조부(祖父)와 부친(父親)의 엄한 명령(命令)을 저버린 채 농사를 집어치우고, 아내와 몇몇 동생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났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따금 그 때를 이렇게 회상하셨다.
“떠나올 때 말이다. 조상 대대로 모셔온 위패(位牌)를 다 태워부렀다. 동생(종철) 바지게에 지우고 나와서 들판에서 태우는디, 수십년 동안 얼메나 잘 말랐던지 시퍼런 불길이 무섭게 하늘로 치솟아, 하늘에서 금방 벼락이 떨어질 것만 같아서 떨리더라 ”
1791년 권상연(權尙然)과 윤지충(尹持忠)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神主)를 불사른 사건으로, 천주교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로 몰리고, 그들이 불효악덕(不孝惡德)의 죄목(罪目)으로 처형(處刑)되었던 역사적 배경도 있었거니와, 그 당시 유교(儒敎) 전통으로서도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蠻行)임을 잘 알았기에, 웬만한 담력(膽力)이 아니라면 대단히 떨렸으리라. 그러나 과거를 깨끗이 청산(淸算)하고 새 출발(出發)하겠다는 비장(悲壯)한 각오(覺悟)가 되어 있어서, 오히려 발걸음이 더 가벼웠다고 하셨다. 아무튼 하나의 혁명(革命)이었다.
조부님은 먹고 살 정도로 전답(田畓)을 상속(相續)하였다고 하시고, 아버지는 모두 빚더미로 담보(擔保)가 되어 있어서 빈 껍데기 뿐이었다고 서로 엇갈리는 주장을 하고 있어, 누구의 말이 옳은지 가늠할 수도 없는데, 어찌 되었건 어머니는 쌀 한 됫박도 도움을 받지 못했노라고 가끔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아무튼 웃어른들의 눈총을 피해 입을 악물고 떠났지만, 일정한 직업이 없이 낯선 땅을 떠돌아 다녔다니, 어려운 살림에 얼마나 삶이 고달팠을까? 한 때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위해 전라북도 정읍 입암면(井邑 笠岩面)에 터를 닦은 *보천교(普天敎)에 홀딱 빠졌다. 보천교는 갑자년(甲子年 1924년) 음력 3월 15일 일본이 물러가면, 교주(敎主)인 차경석(車京錫)이 조선국 임금님이 된다고 믿었다. 3.1 독립운동(1919년)이 실패하자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을 것이다. 아픔과 허전함으로 멍든 가슴 틈새를 파고 든 이 종교에 빠져든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했다. 고대하던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예언은 빗나갔으나 그루터기는 남아, 그 뿌리는 꾸준히 땅 속으로 뻗고 있었는데, 희망을 꺾지 않고 나름대로 정성을 다 했던 아버지께서도 황제의 은혜에 힘입어, 언제인가는 이름도 날리고 벼슬자리도 얻을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만 속절없이 흘러가고, 이것이 속임수인 사교(邪敎)라는 것을 깨닫고 떨어져 나왔다.
그리하여 먹고 살기 위해 목공(木工) 일을 배웠다. 웬만한 지도에는 나타나지도 않는 작은 포구(浦口). 한반도의 가장 남쪽 끝 강진군 대구면 마량리(康津郡 大口面 馬良里.현재는 마량면)에 자리 잡고 살면서, 나를 임신한 것이다. 그 후 내 아래로 두 동생이 태어났으나 모두 잃었다는데, 내가 몇 살 때 어느 동생인지 날리고, 어머니께서 슬피 울던 기억이 어슴푸레 난다.
*용왕수(용왕수)....샘에서 달 그림자를 긷는 것을 용알을 긷는다 하고, 이 용왕수를 떠놓고 동 쪽을 향해 손을 비비며 치성을 드리면 소원 성취한다고 함.
*보천교(普天敎)....옥황상제(玉皇上帝)를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을 교조(敎祖)로 하는 교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