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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口

유년시절

by 최연수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

아버지는 나에게 언문(諺文=한글)을 이따금 가르쳐주셨다. 서당식으로 짜임새 있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심심풀이로 가르쳤던 모양인데, 미련하지 않았던지 곧잘 익혔다. 조기(早期) 교육을 한 셈이다. 이 언문으로 외숙께 편지를 올렸는데 외가 마을에서는 신동(神童)이 나왔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한다. 물론 이 편지는 아버지께서 불러 주신대로 받아쓰기를 했던 것인데...

이 무렵 한자(漢字)도 몇 자 배웠다. 어느 날 아버지는 가게 유리문에 씌어진 ‘출입구(出入口)’라는 한자를 가리키면서 무슨 글자냐고 물었다. ‘出’ 자는 ‘야마’자 두 개 붙은 글자라고 했으며, 가운데 글자는 모르고, 끝 ‘口’자는 ‘구찌’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맞았다고 무릎을 치셨으며, 우리 집에서 일하시던 ‘남수’아저씨도 혀를 내두르며 칭찬을 했다. 그러니까 山은 일어로 ‘やま(야마)’라 하고, 口는 일어로 ‘くち(구찌)’라 하는데, 일어로 대답한 것이다. 이때는 언문과 한자와 일어를 분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된 까닭인즉, 미리 ‘山口’를 배웠기 때문이다. 山口는 일어로 ‘야마구찌’라고 읽었는데, 우리 집안의 일본식 성씨(姓氏)이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며 1939년 성씨를 일본식으로 고치라고 하였는데, 1940년 일본 총독부(總督府)가 창씨(創氏) 개명(改名)을 강제할 때 우리 최씨(崔氏)집안은 やまくち(山口)라고 결정하였다. 최씨는 山田,山村,山川,山本이 많았는데, 왜 우리 집안은 그렇게 정했는지 모르지만, 일본국 야마구찌겡(山口縣)에서 빌려온 성씨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후에 알고 보니까 그 곳은 이토(伊藤)와 데라우찌(寺內)를 비롯한 한반도 침략(侵略)의 우두머리들이 유달리 많이 나온 지방이라는데....더구나 우리가 대구(大口)에서 살고 있으므로, 이모저모로 입과 큰 관련을 맺었는데, 마침 내 입조차 생선 대구 입만큼 커서 ‘대구’라는 별명이 덧붙여지고, 후에 학교 다닐 때는 ‘やまのくち(야마노 구찌=산의 입)’라고 놀리는 아이도 있었다.

이 무렵 부모님은 우리를 간이학교(簡易學校)에 데리고 갔다. 수양버들 가지가 휘늘어진 공동 우물을 감돌아 가면, 넓은 운동장에 나무로 짓고 양철 지붕을 이은 단층(單層) 건물이 하나 서있고, 지붕 위로 일장기(日章旗)가 나부끼고 있었다. 어느 날 가을 운동회는 이 고장의 잔칫날이었다. 학생이라야 고작 70명 안팎이었을 텐데, 동네 사람들 잔치였다. 저고리에 아직도 밑 터진 풍차바지(개바지)를 입고 구경을 갔다. 꼬아서 만든 대오리 테로 굴렁쇠 굴리기를 하는 것과 새끼줄을 넘으며 달리는 것, 내 키보다 더 큰 공을 굴리는 것, 줄다리기 등 모두가 신기하지 않는 게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던 것은 바구니 터뜨리기였다. 파란 하늘에 울긋불긋한 오재미(콩주머니)가 치솟으며 장대에 매달린 바구니를 터뜨렸는데, 그 속에서 비둘기가 나와 날아가고 울긋불긋한 테이프가 휘날리며, 색종이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정말로 꿈나라에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운동장 가에 있는 개골창을 뛰어 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새 옷을 버렸으니, 어머니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고 기분이 대개 상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간이학교에 우리 오뉘를 입학(入學)시킨 것이다. 처음에는 운동회 때의 그 아름답던 꿈을 간직한 채 멋모르고 따라 갔으나, 이내 겁에 질려 안 가겠다고 떼를 썼다. 교실에 들어가니까 열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처녀 총각들이 빽빽이 앉아 일제히 우리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 눈방울이 너무 무서웠다. 여드름이 더덕더덕 나고 콧수염이 까뭇까뭇하게 난 총각들과, 머리를 치렁치렁 땋아 내린 처녀들을 어떻게 사귄다는 말인가? 게다가 처녀들은 나를 업어주겠노라고 실랑이가 벌어지고, 총각들은 나를 무등 태워주겠다고 물건처럼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 싫었다. 한 술 더 떠서 제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뽕알(고환)을 까버린다면서, 자꾸만 고추를 만지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

그리고 학교 뒷산에는 임꺽정(林巨正)이가 숨어 있다는 둥, 측간(厠間=간이화장실)에서는 밤이면 도깨비가 나오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이면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들은 내 간을 콩알만큼 죄어왔다. 나는 마침내 학교에 안 가겠다고 떼를 썼다. 어머니가 어르고 달랬으나 막무가내였다. 아버지로부터 호되게 종아리를 맞고 끌려가다시피 다시 가긴 했지만 그야말로 괴로운 일이었다. 선생님과 아버지가 왜 학교에 가기 싫으냐고 해서, ぺんとう(벤또=도시락)를 안 싸주어서 그랬노라고 대답은 했지만, 이런 얼토당토 않는 핑계에 부모가 고개를 끄덕이었을 리가 없다.

단칸 교실에 아마도 두 학년이 함께 있었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선생님 한 분이 복식(複式) 수업을 했다. 우리는 1학년 줄 맨 앞자리에 앉아서 일본말을 배웠다. 교실 앞에는 괘도(掛圖)가 걸려 있었는데, げた(게다=왜나막신) 아래로 드나드는 손가락만한 난쟁이 아이의 용감한 이야기인 ‘いっすんぼふし(잇슨보시=一寸法師)’와, 복숭아 속에서 나온 아이가 도깨비 집을 정복하고 보물을 가지고 온다는 무용담(武勇談)인 ‘ももたらう(모모따로=桃太郞)’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심청전과 춘향전보다 훨씬 재미있는 이야기였으나, 어떻게 하면 학교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까 하는 생각만 머리에 꽉 찼다.

비 오는 날이면 더 가기가 싫었다. 다른 아이들은 띠 같은 풀잎을 엮어 만든 우장(雨裝=도롱이)란 걸 어깨에 걸치고 다녔는데, 우리들은 노끈 가마니(마대=麻袋)의 한 쪽을 터서 머리에 둘러쓰고 다녔다. 이것이 비에 젖으면 고약한 냄새가 비위를 거슬렀다. 또 교실 안에서는 퀴퀴한 발 냄새가 가슴을 메스껍게 하였으며, 지독한 방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종이에 기름을 먹인 지우산(紙雨傘)이 이 무렵에 나왔는데, 비에 젖지 않고 빗물이 미끄러져 내린 것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간이학교도 얼마가지 않아 떠나게 되었다.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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