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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바람 성난 파도

유년시절

by 최연수

미친 바람이 산이라도 휩쓸어갈 듯이 불고, 성난 파도는 섬들을 삼킬 듯이 덤벼들었다. 이를 노도광풍(怒濤狂風)이라 하겠지. 바람받이 언덕 위에 빈 상자 같이 놓여있던 우리 집도 덜커덩거리며 흔들렸다. 지진(地震)이 나면 그럴 것이다. 한쪽 양철 지붕 조각이 백짓장처럼 곧 날아갈 것 같았으며, 지붕 위로 이따금 별이 보이기도 했다. 다행히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질 않은 마른 바람이었으나, 나쁜 꿈같은 밤을 이불을 둘러쓰고 새웠다. 밤새 바람이 순해지고, 파도도 노여움을 풀었으나 태풍(颱風)이 할퀴고 간 상처들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우리 집도 기둥만 날아가지 않았을 뿐 성한 데가 없었다. 물론 셋집이었지만.

짐이라야 이불 보따리, 솥 냄비 그릇 나부랑이, 그리고 관(棺)같이 생긴 궤짝에 가득 넣은 목공(木工) 공구(工具) 따위였지만 이삿짐을 꾸렸다. 외숙도 오셔서 도와주셨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파도는 잠잠했으나, 아직도 불안은 떨쳐버릴 수 없었는데 배에 실었다. 뱃전에서 손을 내밀면 ‘진질’이라는 해초(海草)가 손에 잡히었다. 우리 오누이는 이것을 뜯어서 질근질근 씹으며 철없이 좋아했다. 출렁거리는 파도에 배가 기우뚱거리고, 이윽고 어머니는 심한 배 멀미를 하더니 이내 죽은 사람 같이 누워있었다. 우리도 어느새 배 멀미에 지쳐 떨어졌다. 깨워 눈을 떴을 때는 어둠이 깔리고 배가 부두(埠頭) 가에 대어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배에서 내렸는데 걸음이 휘청거리고 하늘이 빙빙 돌았다. 어느 집 현관에 들어섰는데, 처음 보는 불빛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공 같이 볼록한 유리 병 속에 밝은 불이 켜져 있는 게 아닌가? 모진 바람이 불어도 까딱하지 않았다. 전구(電球)를 처음 구경한 것이다.

이 여관(旅館)이란 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태풍이 지나간 직후에 배를 타는 일은 모험 중에서도 큰 모험(冒險)이라는데, 아무 일 없이 목적지에 다다른 것은 기적(奇蹟)이라고들 했다.

그 곳이 전라남도 강진읍(康津邑)이었다. 이튿날 짐은 다시 말 달구지에 옮겨 실리고, 어머니와 우리는 달구지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넓게 뚫린 신작로(新作路)로 달구지는 잘도 굴러갔다. 어디론지 멀리 흘러가는 맑은 시냇물, 구름이 쉬어 가는 높은 산봉우리, 그리고 널따란 들녘...펼쳐지는 이 낯선 풍경은 5,6년 동안 조그만 포구에서 우물 안 개구리로 자랐던 우리들에겐 그야말로 별세계(別世界)였다.

드디어 짐을 풀었다. 전라남도 장흥읍(長興邑)에 들어선 것이다. 1941년, 내 나이 일곱 살(만 5세)이었다. 1939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대하여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함으로서 동남아(東南亞)로 뻗어나가던 어수선한 시대였다. 산으로 둘러싸인 읍내를 성안(城內)이라고 했는데 성안 동동리(東洞里) 한길 가에 새 삶터를 잡았다. 물론 남의 셋집이었다. 방과 정재(淨齋所=부엌),점방(店房=가게) 각각 한 칸에 ‘べんじょ(벤죠=변소=便所)’ 하나 딸린 집이었다. 돌아 앉기도 힘든 좁은 부엌에 들어가다말고, 어머니는 부지깽이로 땅을 치면서 목을 놓아 울었다. 이렇게 좁은 집에서 어떻게 살며, 여름에는 변소 냄새 때문에 어떻게 사느냐며 신세 한탄을 했다. 변소는 마량에서와 같은 측간(廁間)이 아니라, 한 가운데 직사각형 구멍이 뚫려있고 한쪽은 오줌 받이가 비스듬히 걸쳐있는 그런 것인데, 깔려있는 판자 바닥이 참 깨끗했다. 누나와 둘이서 함께 들어가 궁둥이를 맞대고 용변을 했다.

첫날 밤 아버지를 따라 마을나갔다. 전기 불을 대낮 같이 켜놓은 채 연이어 들어 서있는 큰 집들, 바삐 오가는 많은 사람들, 빨랫줄같은 전깃줄이 끝없이 늘어져있는 높은 전봇대.....

‘長興橋’라고 새겨진 다리 앞에서 우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탐진강(耽津江)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웬걸 그렇게도 길고 큰지. 뿐만 아니라 다리 양쪽에 세워진 전구는 하늘에서 보름달이 내려와 붙어있는 것 같았고, 이 전깃불이 강물에 어른거려 신비(神秘)함을 더해주었다. 그 다리를 건너갔다 오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징검다리만 건너다녔던 우리에겐 꿈만 같았다. 그 해 여름 내내 저녁밥을 먹고 나면 아버지와 함께 탐진강으로 목욕을 자주 갔다. 이따금 우리 몸을 툭툭 건드리며 지나가는 것은 은어(銀魚)라고 하였다. 은빛 비늘을 가진 이 물고기는 진상품(進上品)이라고 했다.

읍사무소, 금융조합, 경찰서, 군청, 우체국, 재판소, 그리고 기와 얹은 2층집, 그토록 신기했던 자동차, 자전거... 모든 것이 신비한 꿈나라에 온 것 같았는데, 어머니는 왜 흐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이 새로운 환경에 금방 걸맞게 어울려 가는 사이, 그 촌구석 가막섬은 우리들 머리에서 아련히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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