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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의 여행(旅行)

유년시절

by 최연수

어머니의 불만은 쉬 가라앉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공구(工具)를 꺼내어 정리하고 목공 일을 시작했다. 대패질, 톱질, 망치질.... 색종이를 붙여서 나무 상자도 만들고, 책상도 짜며, 뒤주, 밥상, 장롱, 경대 등을 만들었다. 이마에서 늘 비지땀이 흘러 내렸고, 잠자리에 들면 팔 다리가 쑤신다고 앓는 소리도 종종 들었다. 이따금 누워서 우리 오누이에게 허리를 밟으라고도 했다.

그 이듬해 어느 날, 아버지는 여행(旅行)을 떠나게 되었다. 사내는 여행을 해야 한다면서 울며 매달리는 누나는 떼어놓고 나만 데리고 자동차에 올랐다. 처음 타보는 꿈의 자동차였다. 강진 해남을 지나서 갔는데, 얼마동안 가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뜨니까 용당리(龍塘里)라는 부두(埠頭)였다. 잠깐 어느 가게에 들렀는데 진열장(陳列欌) 위에 놓인 어항에 눈길이 갔다. 지느러미를 너울거리며 입을 빠끔거리는 빨간 고기가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물감을 들였나 보다고 생각했으나, 아버지는 그게 금붕어라고 하였다. 이윽고 발동선(發動船)을 탔다.

“뚜우-”

당나귀 우는 소리 같은 고동 소리가 나고 이윽고 배가 움직였다.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 눈물’이 금지곡(禁止曲)이 되어 부르진 못 했지만, 어른들은 아마도 속으로 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곧 목포(木浦)라는 곳에 도착했는데, 장흥(長興)과는 견줄 수 없는 과연 큰 항구(港口) 도시였다. 부둣가에는 커다란 발동선들이 여러 채 떠있었는데 옛날 마량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붐비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곡창(穀倉) 호남의 공출미(供出米)들이 이곳에 집산(集散)되어 일본으로 실려 갔다고 하는 한(恨)많은 항구였다.

어느 여관에서 여장(旅裝)을 풀었는데 층계를 올라가서 2층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잤다. 2층집에서 묵은 것은 처음이었다. 2층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니 우리가 아주 잘난 것 같았으며, 갖가지 가게가 연이어져 있는 길거리가 참으로 희한(稀罕)했다. 여러 가지 음식이 나왔는데, 북어를 찢어 설탕에 볶은 것이 가장 맛있었다. 마치 과자를 먹은 것 같았다. 돌아와서 어머니더러 만들어 달라 했으나 흉내만 내었지, 그렇게 만들지는 못했다. 물도 돈 주고 사 마신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수돗물을 마신다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목재상(木材商)에서 오동나무, 감나무, 베니아(합판)등 목재와, 나비, 박쥐 모양을 한 장석, 무지개 빛깔처럼 알록달록한 자개, 갖가지 칠, 못, 뻬빠(사포)등속을 흥정해서 샀다. 갖가지 물건을 구경하는 일은 참으로 즐거웠다. 단 이틀 동안의 여행이었지만 이야기 거리가 대단히 많아, 자랑하다가 누나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 후 중학교(中學校)에 입학하여 광주(光州)에 올라간 것 빼고는 어른이 될 때까지 여행이란 그 때 딱 한번이었다.

우리 집 근처에는 일본(日本)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공중목욕탕, 변호사, 병원, 시계포, 식료품 가게...... 이들은 좋은 주택과 넓은 마당에 예쁜 화단을 가꾸며 다 잘 살았다. 바로 뒷집에는 조선 여자와 사는 중화요리 집 중국(中國) 사람이 또한 잘 살았다. 잡화상과 미싱 바느질 하는 종배네, 문구와 장난감 가게를 하는 성순네, 음식점을 하는 애돌네, 여관을 하는 고흥댁, けた(게다=일본 나막신) 가게를 하는 신혼 부부 가정들이 약간 나은 생활을 할 뿐, 나머지 조선 사람들은 한결같이 꾀죄죄하며 못 살았다.

1942년은 태평양전쟁의 풍랑이 거세게 일기 시작할 때였다. 처음엔 일본 비행기가 미국의 해군 기지 하와이를 폭격하여 크게 이기었다. 그러나 미군의 총 반격(反擊)에 못 이겨 필리핀 마닐라에서부터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어린 우리가 자세히 알 리가 없었다. 다만 큰 난리가 났다는 어른들의 수군거림을 통해서 심상치 않음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아버지는 웬 사진 두 개를 가져와서 액자(額子)에 넣고 벽에 걸었다. 우리들 가족사진 한 가운데다 나란히 걸었다. 안경을 낀 채 가슴에 훈장을 가득 달고 의젓하게 서있는 남자는 히로히토천황(裕仁天皇)이고, 왕관을 쓴 채 상냥하게 미소를 머금고 앉아있는 미녀는 황비(皇妃)라고 했다. 바야흐로 황국(皇國)의 발전을 위해서 てんのうへいか(덴노헤이까=天皇陛下)에 절대 충성하는 황국의 도(道)를 가르치고 일깨우기 시작했으리라. 그리고 동쪽 벽에다가는 우리 조상들이 모신 신주(神主) 같은 かみだな(가미따나=神棚)라는 것을 만들어 걸었는데, 일본 명절 때면 흰색과 분홍색의 もち(모찌=찹쌀떡)를 차려놓고, 손뼉을 치면서 *동방요배(東方遙拜)를 한 후에 먹도록 하였다.

그 해 음력 5월 23일(양 7월 6일) 동생 상수(祥洙)가 태어났다. 앞집 종배네 할머니께서 해산바라지를 해 주셨다. 태(胎)를 목에 걸고 나왔다고 했다. 하지(夏至)가 막 지난 무렵이어서 무척 더웠다. 단칸방에서 쫓겨난 우리는 임시로 만든 합판 마루에서 여름을 지냈다. 오랜만에 동생을 본 우리는 무척 기뻤다.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기생만큼 예쁘다고 했다. 그런데 아기가 비장(脾臟)이 약한 탓이라며 가끔 푸른 똥을 쌌다. 할아버지 댁에서 한약을 지어다 다려먹였는데, 아기가 허약해서 늘 걱정이 많았다. 아버지는 아기를 너무 호호 불면서 연약하게 키우니까 그렇다 하고, 어머니는 둘이나 날렸는데 또 날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이따금 티격태격 다투었다.

7살 터울이지만 사랑을 빼앗긴 나는 오줌싸개가 되었다. 불장난을 하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부엌에서 아궁이에다 불을 지피는 것은 맡겨진 내 일감이었다. 불을 때다말고 쥐불놀이처럼 불이 붙은 부지깽이를 빙글빙글 돌리는 것은 참 재미나는 놀이였으며, 부글부글 게거품을 뿜어내며 솥 뚜껑 사이로 흰 밥물이 흘러내리는 광경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뜸이 들 때의 구수한 밥 냄새와, 고구마를 잿속에 묻어 넣고 구워먹는 재미는 어디 비길 데 없었다.

‘오늘은 불장난을 안 해야재. 물도 안 마시고 자야재.....’

이렇게 단단히 마음먹고 잤는데도 어김없이 오줌을 싸곤 해서 할 말을 잃었다. 누나는 오줌싸개라고 골려주고, 어머니는 키를 씌워 소금을 얻어오게 하겠다며 종아리를 때렸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줌을 더 쌌다.

“내가 안 쌌단게. 지가 나왔어라우...”

아닌게아니라 나도 몰래 제 스스로 나온 것이다.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아무도 몰래 바지를 말리기도 했지만 지린내야 어떻게 속일 수 있었으랴?


*동방요배(東方遙拜)...동쪽 토오쿄오(東京)의 일본 궁궐을 향해 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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