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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사꾸라

소년시절

by 최연수

병영면(兵營面) 지로리에서 사시는 조부님을 처음 가뵌 것은 아마 예닐곱 살 때였을 것이다. 집집마다 탱자나무 울타리들이 많아서 지로리(枳路里)라 했을 것이다. 사진으로 보았던 할아버지보다는 오히려 젊으셨다. 이젠 시류(時流)를 따라 상투를 자르고 수염을 깎으며, 3부 머리를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흰 머리가 희끗희끗했으니까 초로(初老)의 50대였다. 할머니(漢陽 趙氏 明任)께서는 30대 새까만 머리의 장대(長大)한 분이셨다. 할머니라 하기에는 너무 젊으셨다. 아버지와 9 살 터울이었으니, ‘어머니’라 부르기에 얼마나 껄끄러웠을 것인가?

“연수 왔냐?”

이 한 마디가 전부였다. 사랑채인 약방에 계시다가 식사 때나 마주쳤지만 여전히 별 말씀이 없으셨다. 하룻밤도 더 있고 싶지 않아 곧바로 떠나 왔다. 떠나 올 때도

“잘 가거라”

이 한 마디였다.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겉보기엔 정말 무정(無情)하셨다. 어느 모로 보나 평화로운 가정인데, 부자간 혹은 모자간의 관계가 소원(疏遠)했던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외가와는 너무 대조적이라 그 후 가게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사를 가셨다고 했다. 산간벽지(山間僻地)인 장흥군 장평면(長平面)으로 소개(疏開)를 하신 것이다. 적기(敵機)의 폭격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갓 서른을 넘긴 아버지는 경방단(警防團)에 가입했다. 지방에 있는 의용소방대(義勇消防隊)였는데 훈련이 자주 있었으며, 불이 나면 끄는 일, 홍수 같은 재앙이 나면 저수지를 돌보는 일, 적의 비행기가 폭격을 해서 불이 나면 이를 끄는 일들을 맡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들어가면 징병(徵兵) 징용(徵用)을 안 가게 되어 있었다. 마닐라, 싱가포르, 홍콩....동남아로 진출한 일본은 정복과 승리의 기념으로 하얀 고무공을 배급해주었다. 푸른 하늘 높이 하얀 공을 던지며 기뻐한 일도 잠깐, 태평양의 파고(波高)가 거세어지던 1942년부터 징병제가 실시되면서,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끌려갔다. 거리에는 짙게 그늘진 얼굴로 *천인침(千人針)을 뜨러 다니는 여인들과, 바늘땀을 떠주며 혀를 끌끌 차는 여인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마에는 ひのまる(히노마루=日の丸=일장기(日章旗) 수건을 동여매고, 어깨에는 천인침 어깨띠를 두른 청년들은, トラック(트럭=truck)에 실려 군가를 부르며 싸움터로 떠났다. 그들의 힘을 북돋우기 위해서 길가에 늘어서서 일장기를 흔드는 우리 국민학생들의 환호성과, 발을 동동 구르는 그들 가족들의 대성통곡(大聲痛哭)이 뒤범벅이 되었다. 한편 나이가 든 젊은이들은 징용에 끌려가, 일본 きゅうしゅう(큐슈=九州)나 ほっかいとう(혹카이도=北海島) 어느 탄광(炭鑛)으로 가게 된다며 숨어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어린 소녀들도 공장으로 잡혀간다고 일찍 시집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이 *정신대(挺身隊)였다는 사실은 당시에는 몰랐다. 아무튼 아버지는 징병을 면한 것이 다행이었다.

학교의 모습이 아주 바뀌었다. 동요를 불러보기는 잠깐이었을 뿐, 군가(軍歌)를 날마다 부르다시피 했다. 미국(米國)과 영국(英國)을 무찔러야 한다고 부추기고, 미국 대통령 루즈베르도(Roosevelt=루즈벨트)와 영국 수상 자찌루(Churchill=처칠)의 그림이나 인형을 만들어 바늘로 그 눈을 쑤시고 머리를 짓이겼다. 만약 그들이 우리나라에 올라오면 우리 어린이들은 길가에 눕혀놓고 タンク(당쿠=tank)로 밀어버린다고 적개심(敵愾心)을 심어주었다. 방학 기간을 줄이고 일요일도 한주일 씩 걸러 쉬었다. 공부하다말고 비상종이 울리면 잽싸게 피해서 숨어야 하는 방공훈련(防空訓練)이 매일 실시되었다. 학교 건물 전체를 나뭇가지로 덮어 위장(僞裝)하고,

운동장 둘레에는 방공호(防空壕)를 파거나 채소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학생들은 흰옷을 못 입게 하였다. 흰옷을 입고 오면 물감을 뿌렸다. 그래서 모두들 국방색 물감을 들여서 입었으며, 남자들의 바지가랑이는 각반(脚絆)이라는 띠로 칭칭 감았고, 여자들은 부루마(bloomer)라는 주름 잡힌 반바지를 입었다. 왼쪽 가슴을 다 덮을 정도의 이름표를 달았는데, 주소. 부모님 성명. 생년월일. 심지어는 혈액형도 써넣었다. 책보 외에 적십자(赤十字) 가방도 메고 다녔는데, 그 안에는 붕대, 삼각건과 소오다(soda), あかチン(아까징키=머큐러크롬)등 비상약(非常藥)을 넣었다. 가끔 피 흘림을 멎게 하기 위한 붕대 삼각건(三角巾) 사용법을 배우고, 해군들이 하는 수기(手旗) 흔드는 법과, 통신병이 하는 무전기(無電機) 치는 법도 배웠다. 우리 학교에는 고등과(高等科)라는 학년이 함께 있었는데, 국민학교 6학년을 졸업하면 이 중학 과정의 상급 학년에 진학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나무총(木銃)을 가지고 총검술(銃劍術) 포복(匍蔔) 등 교련을 배웠다.

わかい(若い) ちちおの よかれん(豫科練)の(와까이 지지오노 요카렌노).....


7개의 벚꽃 단추를 빛내며 거수(擧手) 경례(敬禮)를 하는 앳된 소년의 포스터(poster)가 나붙고, 얼굴에 여드름 꽃이 갓 피기 시작한 소년들이 이 포스터 앞에 모여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쟁터에 내몰기 위해서 소년병(少年兵)을 모집하는 내용이었고, 우리들에게 위와 같은 군가(軍歌)를 자주 부르도록 부추기었다.

놋그릇을 바치라고 했다. 총알을 만들기 위함인데, 애국하는 마음으로 자진해서 바치라는 것이다. 그 당시 놋그릇은 참으로 귀한 그릇이었다. 평소에는 쓰지도 않고 모셔놓았다가 명절 때나 제사 지내기 위해서 꺼내어 쓴 귀한 그릇이다. 깨진 기왓장을 빻아 그 가루로 닦으면 황금빛으로 빛났는데, 이 그릇에 음식을 담아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우리네 풍속이었다. 조상 숭배 사상이 몸에 밴 조선 사람들에게, 이 유기(鍮器)를 바치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아버지는 처음엔 중천장을 뚫고 그 안에 감추었으나, 끝끝내 바치고 말았다. 이 그릇들을 징발(徵發)해놓은 창고에 가서 들여다보았더니, 우리는 식기만 내었으나 놋대야, 놋화로, 놋요강, 놋주발...언덕처럼 쌓아놓은 갖가지 귀한 물건들이 눈을 부시게 하였다.

방공 훈련은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국반(愛國班=반상회(班常會) 단위로도 자주 하였는데, 낮에는 방공호로 대피하는 훈련과 불을 끄는 훈련을 하고, 밤에는 등화관제(燈火管制)가 되어 전구에 검정색 가리개를 씌워 불빛이 밖에 새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성안 뒷산 꼭대기에는 감시소(監視所)라는 것이 있었는데, 쌍안경을 통해 적의 비행기가 나타나면 경찰서로 알리고 경찰서에서는 경계경보, 공습경보, 해제경보 등을 사이렌(siren)으로 주민들에게 알리고, 각 가정에서는 경보(警報)의 종류에 따라 색깔별로 삼각 깃발을 달았다. 그런데 우리 집 뒤에는 일본인의 병원이 있었는데, 그 집 늙은 개가 특이해서 이 사이렌 소리만 나면 큰 소리로 똑같이 흉내를 내었다. 이 감시소는 げた(나막신) 가게를 하던 이웃집 木下(기노시다=朴)씨가 근무를 해서 따라가 보았는데, 쌍안경을 처음 만져보았다.

남자들은 머리를 빡빡 깎고 국방색 국민복에 당꼬바지(가랑이만 다리에 꼭 끼게 만든 바지)를 입고, せんとうぼうし(센또보시-戰鬪帽子)라는 모자를 썼다. 여자들은 치마를 못 입게 하고 대신 もんべ(몬뻬)라는 통 넓은 바지를 입으라고 했으며, 방공 연습 때는 냄비를 머리에 눌러 쓰라고 하였다. 집 마당에 방공호를 파도록 하였으며, 비상 식량으로 미숫가루나 보릿가루와 물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학교에서는 적 비행기의 종류를 알아내기 위한 훈련을 했는데, 마아크(mark)는 쉬었으나, 올갠(organ) 소리로 분간하는 일은 어려웠다. 이것을 잘 알아 맞추는 아이들이 대견해 보였다. 그 당시 B29라는 폭격기(爆擊機)가 가장 무섭다고 했는데 이 비행기가 날아가면 온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언덕 아래로 납작하게 엎드려야 하는데, 한 번은 손가락 틈새로 쳐다보았더니 은빛을 번쩍이며 까마득하게 높은 하늘을 유유히 날아가 버렸다. 해제(解除) 경보가 나서 일어났는데 참 싱거웠다. 번번이 그랬다. 지나치게 자주 하는 훈련이다 보니 긴장(緊張)이 풀려 장난이 되어버렸다. 고학년 학생들의 빈정대는 소리도 엿들었다. 어떤 상급생은 조선은 폭격을 안 한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해서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천인침(千人針).....무운장구(武運長久=전쟁에서의 좋은 운)를 비는 마음을 담아, 긴 어깨띠에 1000명의 정성을 모아 1000개의 빨간 실의 바늘땀을 얻는 것임. 이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 면 적탄이 맞지 않는다 함.

*정신대(挺身隊)....일본군을 위한 종군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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