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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깻묵과 도둑

소년시절

by 최연수

*대본영(大本營) 발표를 들어보면 일본이 연이어 이긴다는데 세상은 점점 어수선해졌다. 쌀은 거의 다 일본으로 공출(供出)로 가져가고 배급제(配給制)가 실시되어 야미쌀(암거래 쌀) 보기도 힘들었으며, 잡곡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점심 때가 되면 보리밥 한 그릇 끓여서 너덧 식구가 나눠먹었다. 죽보다도 멀건 밥을 먹고 나서 빈 숟가락만 빨거나 입맛만 다시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점심(點心)이란 마음에 점 하나 찍는 것이라고 그럴싸하게 핑계를 대었으나, 목구멍에 풀칠한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일 것이다. 도토리를 주워다가 묵을 만들어 먹고, 심지어는 맷돌에 솔잎을 갈아서 그 즙에다가 약간의 설탕을 넣어 먹기도 했다. 그런데 오만상을 찌푸리며 사약(賜藥)처럼 마셨는데 구역질이 나서 마실 수 없었다. 어느 날은 콩깻묵이 배급으로 나왔다.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인데 중국 만주(滿洲)에서 나는 콩이라는 것이다. 만주에 *만주국(滿洲國)을 세운 일본은 그 기념으로 콩깻묵을 배급한 것이다. 약간 고소해서 나는 몇 주먹을 먹었다. 그런데 얼마쯤 후에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나와 어머니는 꾀병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안했다. 점점 더 아파 오는데 그저 웃기만 하는 것이다.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와서, 방안에서 데굴데굴 굴렀으나 보는 척 마는 척 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끙끙 앓았더니 그제야 참말이냐 하면서 앞에 있는 가야병원으로 업고 갔다. 의사는 주사를 놓았는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대나무 가시를 뺀 이후 두 번째 병원 출입인 셈이었다. 다행히 아픔이 가라앉고 살 것 같았다. 아마도 썩은 콩깻묵으로 인한 식중독(食中毒)이었을 것이다. 그 때 난 죽는 줄 알았다.

배가 고픈 보릿고개 때에는 들로 나물을 캐러 다니거나 산으로 취나물을 뜯으러 다녔다. 이른 봄 연한 소나무 순을 꺾어먹기도 하였으며, 소나무 겉껍데기를 낫으로 한 겹 벗기면 달콤하고 물기 많은 속껍질이 드러났는데, 이 송기(松肌)를 벗겨서 먹기도 했다. 이렇게 풀 뿌리 나무 껍데기로 목숨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외가에서 갖다 준 고구마를 쪄먹는다거나, 메밀가루로 죽을 쑤어먹기도 하고, 서속(黍粟=좁쌀)투성이의 밥을 지어먹기도 했는데, 쌀밥 한 그릇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고, 꽁보리밥도 고급이어서 점심은 거르기가 일쑤였다.

“니 엄니는 호랭이 해에 태어났은께 괴기를 좋아 한다 잉. 괴기를 못 먹어 소질병(?)이 생겼다...”

어머니는 이따금 이런 말을 하였다. 어느 날은 우리 집 검둥이가 쇠고기 한 덩이를 물고 왔

다. 이웃집이 음식점이었으니까 거기서 물고 온 건 틀림없는데, 어떻게 주워 왔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걸 빼앗아서 잘 씻은 후 석쇠에 구웠다. 그리고는 검둥이에게도 조금 주고 어머니 혼자 다 잡수셨다. 나에게는 주지도 않았다. 혹시 주셨을지라도 못 먹었겠지만. 어머니는 검둥이를 효자라고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면서

“너도 커서 소자(효자) 될라믄 니 에미에게 괴기 많이 사다주라 잉!”

“...........”

아기(상수 동생)는 우는데 장보러 나가신 어머니가 하도 돌아오지 않아, 기다리다 지친 나는 아기를 업고 가만히 장터에 나가보았다.

“어!”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머니 혼자 밀가루칼국수 팥죽을 사 잡수시는 게 아닌가? 나는 안 보아야 할 죄를 지은 것처럼 황급히 집으로 뛰어오고 말았다. 그토록 어머니가 서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칼국수팥죽을 혼자서만 사먹다니... 오죽 배고프면 그랬겠느냐고 이해하기까지는 아마 몇 년은 흘렀으리라.


* 대본영(大本營)...전시에 일본 천황 직속으로 두었던 최고의 통수부.

* 만주국(滿洲國)...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침략한 일본의 관동군이, 중국 동북지방에 세운 괴뢰국(傀儡國)(1932-1945)

* *

취학(就學)전이니까 예닐곱 살 쯤 되는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께서 납작보리쌀(압맥=壓麥) 배급을 타러 가시려고, 바구니에다 조선은행권 지폐(紙幣)(액면가액은 모름) 한 장을 놓은 채, 잠깐 이웃집에 갔다 올 테니 집을 보라며 나가셨다. 밖에서 놀다가 우연히 집 쪽을 바라보니 웬 아저씨가 담배를 피워 물고 느긋하게 집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나는 돈을 훔쳐 갔으리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곧 뛰어 들어가 바구니 안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돈이 없어진 게 아닌가?

“ 아자씨, 왜 우리 돈 갖고 가요?”

“ 요놈 봐라! 먼 돈을 갖고 갔다고...”

그는 버럭 화를 내더니 잽싸게 걸어갔다. 나는 재빨리 이웃집에 계신 어머니께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달렸다. 그 사람을 잡으라는 것이다. 읍사무소 앞이 7거리 광장이고, 그 곳에 차부(車部=정류장)가 있었으며 항상 사람이 붐비었다.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잠깐 보았던 그 사람을 찾아내기란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어느 자동차가 출발하려고 시동(始動)을 걸고 있었는데, 차창(車窓)을 통해서 바로 그 아저씨의 얼굴이 보이는 게 아닌가?

“저 사람이여!”

나는 그 아저씨를 가리켰다. 어머니는 다짜고짜 차에 올라 그의 두루마기 자락을 붙들고 돈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생사람 죽일 소리한다면서 어서 출발하라고 운전수를 다그쳤다. 차창(車窓) 밖으로 얼굴을 내민 그는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죽일 놈이라며 고함을 쳤다. 차안은 뒤범벅이 되어 떠들썩했는데, 때 마침 사복(私服) 형사가 있어 그 사람을 끌고 경찰서로 갔다. 나는 가슴이 방망이질하였다. 만일 의심 없이 풀려나면 나는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함께 따라갔던 어머니가 한참 후에 돌아왔는데 돈을 찾아왔다. 그의 몸을 뒤진 결과 흰 고무신도 훔쳐서 허리띠에 묶고, 우리 돈은 조끼 주머니에 넣었더라는 것이다. 그는 그 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모르나 나는 동네서 영웅이 되었다. 졸지에 도둑을 잡은 용감(勇敢)한 소년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아무튼 배급받기 위해서 마련한 것이라 대단히 귀한 돈인데, 그 어려운 형편에 잃어버리고 못 찾았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돈이 있어도 야미쌀도 구하기 힘든 시절, 온 가족이 쫄쫄 굶으며 얼굴이 붓고 누렇게 부황(浮黃)나지나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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