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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과 벚꽃

소년시절

by 최연수

우리 やまと(야마또=大和) 국민학교는 성밖 다리 건너 건산리(건山里) 외딴 곳에 있었는데 조선인들만 다닌 학교였다. 물론 일본인이 교장이었고 일본인 선생도 있었다. 일본 학생만 다니는 학교는 성안에 あさひ(아사히=旭) 국민학교(해방후 서국민하교)였다. 학생 수가 적은 작은 학교였으나, 학생들의 몸차림이 어찌나 깨끗하고 단정한지 마치 인형(人形)이 걸어 다니는 것이었다. 우리 남자들은 책보를 등에 걸치고 여자들은 허리에 메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예쁜 란도셀(ransel)을 지고 다녔다. 우리는 짚신이나 げた(게다=나막신)를 신는 것이 고작이고, 검정 고무신이나마 신고 다니는 아이는 극히 드물었는데, 그들은 운동화(運動靴)를 신고 다녔다. 그들은 우리 조선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놀았다.

나는 그들이 매우 부러웠다. 어느 때는 가만 가만 그들 뒤를 따라갔다가 빠끔 열려있는 대문 틈으로 그들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대개는 세퍼드(shepherd)나 포인타(pointer) 같은 개를 키우고 있어서 가까이 가지 못했으나, 용하게 성공한 날은 궁궐을 구경한 듯 했다. 방안까지 들여다보지는 못 했으나, 정원은 꿈의 동산이었다. 유리병을 거꾸로 박아 꽃밭 둘레를 둘러놓은 것도 신기했고, 연못을 파서 한 가운데 섬을 만들어 기묘한 바위들을 세워놓은 것이랑, 잘 다듬어진 이름 모른 나무들과 사철 피고 지는 화초(花草)들이 한데 어울려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도 저런 꽃밭을 맨들어야지’

우리 조선 사람들은 손바닥만한 마당이라도 있으면 텃밭을 일구었지, 꽃밭을 가꿀만한 경제적 여유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장독대나 싸리 울타리 가에 맨드라미, 봉숭아, 꽈리, 접시꽃, 나팔꽃이 저절로 피었거나 우물가나 텃밭 둘레에 채송화가 저절로 피어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 우리 집은 꽃밭은커녕 한 뼘의 마당도 없어, 일본 집 정원은 나에게는 헛된 꿈이었다. 산에서 나무를 뽑아다가 빈 통에 심어 낙숫물 떨어진 처마 밑에 놓아두고 물을 주었더니,

“니 에미 엉덩이에나 심어라!”

어머니의 이 말이 송곳 같이 내 귓전을 찌를 때, 나는 울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좁은 집에서 늘 옷자락에 걸리고 발부리에 차이다 보니까 귀찮아 내뱉은 말이겠지만, 어린 내 가슴에는 아린 상처였다. 곧바로 그 나무들은 다 버렸지만 일본 집 정원(庭園)의 그 아름다운 풍경은 항상 내 망막(網膜)에 어른거렸다. 내 나이 50이 넘어 일본을 처음 여행했을 때, きょうと(교오또=京都)의 어떤 일본 집 정원을 구경하고는, 바로 그 때의 정원을 옮겨 놓은 것 같아서 놀란 일이 있었다.

한길 건너편은 남동리(南洞里)였다. 남동리 뒷산을 남산(南山)이라고 불렀다.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이 산 위에는 일본의 신(神)을 모신 じんじゃ(진쟈=神社)가 있었다. 돌층계를 올라가서 활터를 옆에 끼고 とりぃ(도오리=鳥居)라는 문을 지나면 우뚝 서있었다. 그 앞에 줄지어 서서 손뼉을 세 번 치고 고개를 숙이며 두 손 모아 묵념(黙念)을 하곤 했다. 일장기를 앞세우고 학교에서 가기도 하고 통학단(通學團)에서도 갔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 풀이 난다’고 하지 않는가? 이 때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기를 빌었다. 왜냐하면 그 때 우리나라가 곧 일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으로부터도 우리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쳐져 주권(主權)을 잃었다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 했으며, 독립(獨立)을 해야 한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 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말의 의미도 정확히 몰랐으며, 일본인이 왜 우리 조선인을 차별(差別)하며 업신여기는지 조차 확실하게 몰랐다. 그저 꾀죄죄하고 못 살기 때문이라는 것만 막연하게 알고 있었을 뿐이다. 또한 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요, 배운대로 우리는 황국 신민이라고 머리에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남산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신사(神社)를 모셨으니 그럴 수밖에. 어느 곳 한 군데 파인 곳이나 무너진 곳도 없고, 휴지는커녕 검부러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돌층계는 애국반(반상회)에서 나와 항상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으며, 나뭇잎도 닦아놓은 듯 윤이 났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정성껏 가꾸어지고, 이 산에다 오줌을 누기는커녕 침도 뱉지 못했으며, 개도 데리고 올라가지 못 했다.

이 남산의 자랑은 뭐니 뭐니 해도 사꾸라(さくら)였다. 이 *벚꽃은 일본의 국화(國花)였기 때문에 소중하게 가꾸어졌는데, 봄이 되면 성안은 이 벚꽃에 뒤덮이다시피 했다. 달이 없어도 으스름한 달밤처럼 밝을 정도였으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꽃이 질 때는 한꺼번에 떨어져, 하늘은 흰 나비 떼들의 춤판 같았으며, 거리는 쌓인 눈벌판 같았다. 신사(神社)와 뚝 떨어진 외진 곳에서는 놀이가 허용되었는데, 꽃이 만발한 벚나무 아래서 장구를 치며 춤을 추던 아버지의 사진과, 우리 오누이가 아버지와 함께 벚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불이 났을 때 아깝게도 타져버렸다. 벚꽃이 한창일 무렵에는 일본 사람들은 전통 옷을 입고 꽃가마를 매며 はなまつり(하나마쯔리)라는 꽃 축제를 벌이었다.

다람쥐는 흔했고, 노루도 가끔 눈에 띄었으며 꿩도 있었다. 여름에는 매미가 울어대는데 산이 쩡쩡 울릴 정도였다. 이래서 유산객(遊山客)들이 많았는데, 벚꽃이 필 때쯤이면 이웃 고을 학교에서 원족(遠足=소풍)을 많이 왔다. 벚나무에서 나오는 찐득찐득한 진에 침을 묻혀 손가락으로 붙었다 떼었다 하면 거미줄 같은 허연 섬유가 나왔는데, 여자들은 이걸 손톱마다 씌워 누에고치처럼 하고 다녔으며, 송진(松津)에다가 크레용(crayon) 가루를 섞어 짝짝 껌을 씹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나뭇잎 하나 따지 못했으나, 먼 산에 가서는 나무를 했다. 갈퀴를 가지고 떨어진 솔잎을 긁어모았다. 이걸 새끼로 묶어 와서 땔감으로 썼는데, 몇 십리 밖 먼 산까지 가서 솔가지를 꺾거나 장작을 패다가 저자에서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른 새벽 주먹 밥 몇 덩이 허리춤에 싸 가지고 올라가 종일 일하다가, 해가 질 무렵에 내려오곤 했는데, 엄청나게 힘들어 보였다. 아버지는 가끔 나에게

“너 공부 안하믄 똥장군이나 나뭇짐 지라 할거다. 잉”

하고 겁을 주었다. 그만큼 힘겹게 일하는 농부와 나무꾼이 된다는 일은 나에게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 남산의 벚꽃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벚꽃(왕벚나무)...일본은 소메이요시노사쿠라(染井吉野櫻)라고 함. 소메이( 현재 도쿄의 소메 이촌)+요시노(현재 나라의 요시노산)의 합성어로 1900년 일본 식물학자가 만든 말.

그러나 1908년 제주도로 온 프랑스 선교사 타퀘르 신부는 한라산에서 왕벚나무를 발견함.

1912년 독일 식물학자가 퀘흐네가 한라산 관음사 부근에서 왕벚나무를 발견 학계에 보고함.

왕벚나무의 제주도 자생지설이 유력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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