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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놈

소년시절

by 최연수

몸집도 작은데다가 빼빼 말라 허약(虛弱) 체질(體質)이었다. 추위가 제일 싫었다. 속옷도 입지 못한 채 홑바지일 때가 많았다. 겨울엔 늘 콧물이 마르지 않았으며 계집 아이 같은 가냘픈 손이 무척 시리었다. 성격도 모질지 못하고 여려서, 큰 소리를 쳐본다거나 소리내어 울어본 일도 없었다. 조그만 잘못에도 곧잘 얼굴이 화끈거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려면심장이 두근대고, 호흡이 거칠어져 말이 빠르며, 긴장을 하면 손에 땀이 났다. 아는 것도 아는 척, 잘 하는 일도 잘한 척 해보지 못한 채 늘 부끄러움을 탔다. 붙임성이 없어 누구에게 뭘 달라고 조르거나 떼쓰거나 부탁하기는커녕, 숫기가 없어 누가 뭘 주는 것도 받아먹지 못 하고 고개를 돌린 채 도망쳐오는 일이 많았다. 맛이 없어 젓가락이 안 가는 음식은, 불쌍해서 그걸 내가 먹어 주었다.

이런 아이들은 대개 약삭빠르고 옹골져서 잔꾀로 실속을 챙기는 법이지만, 나는 그러지도 못해서 아무 쓸모없는 못난 놈 그대로였다. 키 크고 힘센 아이들과 거친 아이들은 무섭고 싫었다. 누굴 한 대 때려주기는커녕, 욕도 못 해보지 못했다. 그런 아이들과 놀다보면 매양 얻어맞거나 속아 넘어가서 이용당하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혼자 집안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가위질해서 뭘 만들거나 하지 않으면, 누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계집애들, 나보다 어리고 약한 아이들하고 보스락 장난이나 하였지, 개구쟁이 짓도 제대로 못했다. 악동(惡童)이 되어 남을 괴롭히거나 귀찮게 하는 짓궂은 장난일랑 해보지 못 했다. 누나는 나를 보호해주는 보디가드(body guard)였지만, 이런 나를 따돌리려고 애를 썼다. 그럴수록 나는 떨어지지를 못 했다. 그러고 보니 하는 짓이 모두 계집 아이 같았다. 사내아이들은 말뚝박기, 자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연 날리기, 팽이치기, 제기차기 등 놀이를 많이 했는데, 그들과 어울려 놀다가는 구슬이고 딱지고 모조리 잃거나, 내기에 져 가지고 책보 들어다 주기, 심부름 해주기 등 こづかい(고쓰가이=시중드는 사람) 구실만 하였다.

이렇게 못난이로 태어나 뭐든지 자신(自信)이 없어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바라는 것을 채우지 못한 채 늘 몸과 맘이 텅 비어 있는 망태 자루 같았다. 말끝이 우물우물 흐리다고 핀잔을 받곤 했다. 이를 ‘샤이 증후군(shy synerome)’이라 하고, 이것이 사회적 관계를 두려워하는 ‘사회공포증(social anxiety)'으로 확대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기질적으로 부끄러움을 타는 것인지, 학습의 결과인지 알 수 없으나, 별 볼 일 없는 이 맏아들이 아버지의 눈에는 오죽 딱하였을까?

“그래갖고 밥이나 묵고 살겄냐?”

한숨 쉬는 아버지의 말을 들을 때마다 더욱 어깨가 축 쳐졌다. 야단을 맞으면 그저 왕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흐느껴 울기만 했다. 매를 맞으면 어머니는 빨리 도망가라고 눈짓을 했으나 도망도 못 가고 앉아서 맞기만 했다.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났을까? 요즘 같으면 자폐증(自閉症)이라고 했을 것이다. 해방 후 어느 날 학교에서 장화(長靴)를 잃었다. 모처럼 비싼 값으로 사다준 신인데 누군가가 신고 가버렸다. 담임선생에게 말도 못한 채, 눈물만 흘리며 맨발로 집으로 돌아왔다. 물에 빠진 새앙쥐 꼴을 하고 들어온 아들을 바라본 부모님은 얼마나 한심스러웠을까?

“이 못난 놈아, 그래 선생님께 말을 해야재 그냥 왔단 말이냐? 싸게 가서 찾아 와! 못 찾아오믄 쫓아낼테니께.....”

학교에 되돌아간들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다른 학급 신장까지 샅샅이 찾아봤는데... 죄인이 되어 오금을 펴지 못하고 지냈다. 그저 야단맞으면 울고, 울면 야단맞고....

“삐씩하믄 울고, 삐씩하믄 울고...저놈의 눈물 받아 묵는 점을 없애야재...”

어느 날 어머니는 양잿물(수산화나트륨)을 가져와서, 내 얼굴의 점에 찍어 발랐다. 왼쪽 눈시울 밑에 있는 두 점은 눈물을 받아먹고 큰다는 게 아닌가? 내가 노상 잘 울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커진다는 것이다.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리며 쓰라리고 아팠다. 지금 생각하면 아슬아슬하게 위험한 일이었지만 아닌게아니라 점은 없어졌다. 지금도 그 흉터는 남았지만. 태어날 때도 울지 않았다는 내가 왜 그리도 눈물이 많았을까?

학용품(學用品) 하나 변변히 없었다. 물자(物資)가 귀할 때였지만 집안 살림도 어려웠다. 공책이란 게, 연한 갈색 빛깔이 난 종이, 그나마 한 쪽만 반들거릴 뿐 다른 쪽은 사포(砂布)처럼 깔끄러운 종이를 사다가 잘라서 꿰매어 썼다. 연필은 몽당연필을 대롱에 끼어 쓴 것은 물론 부러진 연필심조차 꿰어 썼다. 용돈이란 가져본 기억이 전혀 없다. 갖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이 없었으랴만 기대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이런 나에게 돈이 생겼다. 누가 주어서 생긴 용돈이 아니라 바로 도둑물건이다. 동전 한 꾸러미였는데 얼마나 큰돈이었는지 지금도 그 값어치를 헤아릴 수 없지만, 이것으로 인해서 아버지로부터 죽도록 맞았다. 사건은 이렇다. 이웃에 M이란 아이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징용(徵用)에 끌려 나가 안 계셨고, 의붓어머니 밑에서 살았다. 찬 다듬잇돌을 베고 자다 그랬노라고 입이 한 쪽으로 돌아가 ‘비틀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성질이 사납고 행동이 거칠어 참 무서웠다. 나보다 서너 살 쯤 위였는데 이 아이의 꾐에 빠진 것이다. 앞집에는 장난감과 문구류(文具類)를 파는 가게가 있고, 그 집 아이 S가 동전 꾸러미를 자기 집 변소 근처에 묻어놓았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안 계실 때에는 그가 물건을 팔고, 그 때마다 금고에 넣지 않고 제 몫으로 챙겼던 것이리라. 그런데 이것을 파 올 테니 나더러 망을 보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늘 그를 무서워했기에 그대로 따랐다. 그는 어렵지 않게 돈 꾸러미를 파서 장흥교(長興橋) 밑으로 데리고 가서 나에게 얼마만큼 주었다.

“누구한테 말하믄 넌 쥑여!”

그의 말은 무서웠다. 그 돈을 받아들고 와서 그만 누나에게 들키고 말았다. 누나는 아버지께 일러바치고, 아버지는 따지고 캐어 물었다. 아버지의 책장에서 꺼내갔지 않았느냐고 다그쳤으나 나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그라믄 어데서 났냔 말이여?”

“다리 밑 땅 속에서 팠어라우.”

아버지는 누나를 붙여 다리 밑 현장(現場)에 보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흔적을 찾을 리 있으랴. 바른대로 말하라고 죽도록 맞았으나 끝끝내 사실대로 털어놓지를 못 했다. 아버지보다는 문길이가 더욱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버지의 돈을 훔쳤다는 창피한 이름을 벗지 못한 채 몇 년을 끙끙 앓고 살았다. 내 물건 아니면 절대로 손대지 않겠노라는 생각은 그 때에 굳게 다져졌다. 이 사실은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비로소 털어놓았다. 왜 그 때 말하지 못 했느냐고 했지만, M이라는 존재가 나에게 있어서는 그만큼 생사를 가늠하는 무서운 존재였다.

밖에 나가서는 다른 아이들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면서도, 만만한 누나에게는 잘 대들었다. 이불 속에서만 호랑이 잡는 격이다. 누나가 약올리고 고자질 했다고 꼬투리를 잡아 옥신각신하다가 그만 누나의 머리끄덩이를 붙잡는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화가 난 아버지로부터 종아리를 맞고 둘이서 그만 쫓겨났다. 날이 어두워진지 오래 되었고 저녁밥도 먹지 못했다. 배는 고프고 한기(寒氣)가 들어 몸이 으스스했다.

“얼른 아부지한테 빌어”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눈짓을 하며 용서를 빌라는 것이다. 누나는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아부지, 다시는 안 싸울게라우. 용서해 주시요”

하고 천연덕스럽게 두 손을 비볐다.

“그래, 들어와 밥 묵어”

방문이 열리고 누나는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보나 마나 밥을 먹은 것 같았다.

“이 놈아, 너도 잘못 했다고 싸게 빌어.”

어머니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빌기는커녕 누나가 얄미워 눈을 흘겼다. 입을 비죽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잘못은 없는데, 내가 왜 빈단 말인가? 밤이 꽤 깊었다. 방안에서 도란도란 새어나오는 목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이었다.

“저놈의 옹고집을 꺾어야재. 가만 둬”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토록 야속할 수가 없었다. 잘 잘못을 가려줄 생각은 안 하고, 누나 편만 들고 누나만 용서하다니.....

“너 요렇그롬 밤 새울거냐? 예끼 이 못난 놈아..........”

못난 놈이라니 어머니도 야속했다. 드디어 불도 꺼졌다. 이제는 잠자리에 든 것 같았다. 겁 많던 나는 이제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동네 개 짖는 소리에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입을 악물어 보았지만 고양이 소리에 소름이 돋았고, 쥐 한 마리 지나가는데 가슴을 쓸어내렸다.

‘빌라고 한번만 더 하지.....’

그러나 방 안도 바깥도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나를 바깥에다 세워놓고 자기네들끼리만 잔다는 말인가? 어쩌면 그렇게도 무정할까? 이제는 눈물이 가랑가랑 고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방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 때다!

“아부지 잘 못했어라우. 다시는 안......”

나는 말도 맺지 못 하고 흐느꼈다.

“알았어 들어 와! 또 한 번만 그래봐라. 그 땐 없어?”

“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방으로 들어갔다. 한 쪽 이부자리 구석으로 다리를 뻗어 넣었다. 누나는 깊이 잠든 듯 했다. 눈을 감았지만 허기(虛飢)지고, 엎치락뒤치락 잠이 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 못은 없는 것 같아서 자꾸 눈물만 나왔다. 이튿날 잠에서 깨었는데, 부끄러워서 아버지를 바로 바라볼 수 없었고, 누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에게 말을 걸어 왔지만 나는 애써 누나와도 외면을 했다.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빈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톡톡히 체험했던 사건이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빤히 잘못했으면서도 끝끝내 시인하지 않고 버티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 때 일을 떠올리곤 했으며, 예수를 믿고 나서 죄의 고백이 얼마나 어려우며,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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