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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고 건너뛰고

유년시절

by 최연수

1943년이면 일본 연호로 쇼와(昭和)18년이다. 1월에 독일이 20만 명의 전사자(戰死者)를 내고 전쟁에 질 때요, 5월에는 이태리가 무조건 항복(降伏)하던 때이다. 이 두 동맹국을 잃은 일본이 전시(戰時)동원 체제로 들어가 징병제를 실시한지 2년 째이고, 소학교(小學校)는 국민학교(國民學校)로 간판을 갈아 단지 3년째 된 해이다. 이 해 2월 10일 아버지는 비로소 나의 출생신고를 하였다. 그러니까 만 7년 동안 호적(戶籍)이 없다가 입학하기 위해서 신고를 했을 것이다. 우리 오누이는 아버지를 따라서 장흥(やまと=야마또)공립국민학교(長興大和公立國民學校)에 갔다. 어렸을 적에 잠깐 다녔던 마량의 간이학교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운동장 한 쪽에, 억불산(億佛山)을 마주보며 서있는 건물은 목조(木造) 2층이었다. 건물 정면(正面) 한 가운데는 일장기, 그 양쪽에는 ‘내선일체(內鮮一體’ ‘미영격멸(米英擊滅)’이라 씌어있는 현판(懸板)이 걸려있었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요, 미국 영국을 무찌르자는 뜻이었다. 동쪽 탱자나무 울타리에는 개구멍이 있어서, 교문을 통과하지 않고 그 곳으로 등하교 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어서 벌을 서곤 하였다. 남쪽 담장 앞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platanus)가 자라고 있었는데, 여기에 세워놓은 긴 대나무 장대는 철봉과 함께 운동기구였다. 북쪽의 건물 뒤편에는 교재원(敎材園)이 있었는데, 학급별로 나뉘어 있어서 분뇨(糞尿=똥 오줌)로 채소들을 가꾸고 있었다.

그 때는 의무교육(義務敎育)이 아니므로 시험을 보아야 할 때이고, 공부 못 하면 낙제(落第), 잘 하면 월반(越班)도 하였다. 시험은 선생님 앞에서 일본말로 간단한 구술(口述) 시험을 보는 것인데, 누나는 붙었지만 나는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얼마의 경쟁율(競爭率)이었는지는 모르되, 세 학급을 뽑는데 낙방을 한 것이다. 누나는 비록 헌 것이지만 예쁜 ラントセル(란도셀=책가방)를 얻어 등에 메고 매우 좋아했다. 그런데 사실은 나도 은근히 좋았다. 왜냐하면 학교 다니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1학년 남자 반은 まつくみ(마쓰구미=松組)고, 나이가 든 누나 반은 うめくみ(우메구미=梅組), 나이가 어린 남녀 공학(共學)반은 たけくみ(다께구미=竹組)였다. 내가 합격했다면 틀림없이 다께구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게 아니었다. 마량에서 어린 나이에 간이학교까지 다닌 적이 있는 신동(神童?)이 떨어졌다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오기(傲氣)가 나서 일손을 멈추다시피 나를 가르친 것이다. 물론 일본말과 일본글 カタカナ(가타카나)를 익혔다. 그리고는 2학기 때쯤 되었는데 2학년 시험을 보러 갔다. 교장실에서 교장 선생님 앞에서 カタカナ도 읽어보고 구술시험(口述試驗)을 보았는데 합격이 되었다. 누나는 1학년인데, 나는 껑충 2학년으로 뛰어오른 것이다. 역시 신동은 다르다고 동네에서 야단이었다. 2학년은 남자 두 학급, 여자 한 학급이었는데, 나는 2조(組)였다.

담임은 ながさき(나가사끼=長崎)라는 남자 선생이었다. 툭 튀어나온 큰 눈은 나의 눈을 뚫어져라 쏘아보고, 조개처럼 꽉 다물어진 큰 입은 내 어깨라도 깨물 것 같았다. 교실이 떠나갈 듯 쩡쩡 울리는 “ばか(빠가=馬鹿)!” “こら(꼬라)!”의 호통은 오금을 펴지 못 하게 했는데, 게다가 ‘ぼう(보우=棒)’라고 하는 내 키만한 대막대기를 끌고 내 옆을 지나가면 찬바람이 일었다. 출석을 부르면서 위 아래로 훑어보는 그 눈초리에 나는 그만 기가 질려, 대답조차 목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 하물며 묻는 말에 뭘 안다고 손을 들고 대답할 생각이나 했겠는가? 흔히 수업 중에 백묵(白墨=분필)이나 지우개가 휙 휙 날아갔다. 나에게 던진 것은 아니었지만 깜짝 깜짝 놀랐다. 의자를 들고 벌을 서거나, 종아리를 맞을 때는 식은땀이 죽죽 흘렀다. 나에게는 학교가 아니고 감옥(監獄)이었다.

월요일 첫 시간은 수신(修身) 시간이었다. 무릎을 꿇고 교실 바닥에 앉아 한참 명상(瞑想)을 하다가, 눈을 뜨면 긴 설교가 시작되었다. 선생님 말속에서 혹시 てんのうへいか(덴노헤이까=천황폐하=天皇陛下)소리만 끼어도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가장 두려운 것은 외우는 것이었다. ‘こうこくしんみんのちかい(황국신민의 서사=皇國臣民의 誓詞)’를 비롯해서 ‘군인(軍人)의 정신(精神)’에 이르기까지 별별 걸 다 외워야 하는데, 그 중에서 ‘교육칙어(敎育勅語)’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몰랐으며 외워지지도 않았다. 그 때마다 선생님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벌을 주었다. 특히 나에게는 그런 것도 못 외우는데 어떻게 2학년에 입학을 했느냐고 빈정대는 바람에 주눅이 들어 반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말더듬이처럼 구구단을 외다가 틀리면 또 벼락같은 꾸지람이 떨어졌다. 선생 공포증(恐怖症)과 학교 불안병(不安病)에 걸린 것이다. 게다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몸집도 작고 성격도 여린 나를 감싸주기는커녕, 툭하면 골려주고

손찌검하며 귀찮게 하는 바람에 노이로제(Neurose 도)에 걸릴 지경이었다. 꿈에도 학교는 지옥(地獄)이었다. 학교 가기가 싫어서 떼도 써보고 꾀도 부려보았지만, 부모로부터 번번이 야단만 맞았다.

입학한지 몇 달 만에 3학년에 진급(進級)했지만 담임은 그대로였고, 공부는 더욱 어려워졌다. 두 자리수 이상의 곱셈은 번번이 틀렸다. 구구단은 외웠는데 왜 자꾸만 틀린 것일까? 맞는 아이들을 훔쳐보았더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릿수에 따라서 엇갈려 쓰는 까닭을 알 수 없었는데, 선생님께 여쭈어볼 만한 용기가 없었고, 아이들에게 물어볼 만큼 숫기도 없었다. 교과 공부는 오전 중에만 하고 오후에는 근로(勤勞) 봉사에 나갔다. 학교 교재원(敎材園) 채소를 가꾸고, 마을로 나가서 모도 심고 보리와 벼도 베었으며, 겨울에는 보리밭 밟기도 하였다. 군마(軍馬)에게 먹인다고 꼴도 베었는데 책임량(責任量)이 주어져 무진 애를 썼으며, 낫질이 서툴러 늘 손을 베곤 했다. 어느 때는 기름을 짠답시고 관솔(소나무 옹이 부분)을 꺾으러 산을 헤매고, 소나무 그루터기와 솔뿌리를 파느라고 상급생들과 한 조가 되어 괭이질 삽질도 했다. 풀을 베다가 땡벌(땅벌)을 건드리어 혼난 적이 있었는가 하면, 모를 심다가 거머리가 붙은 것은 예사며, 논둑에서 똬리 튼 뱀을 밟을 뻔한 일도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허약(虛弱) 체질이었다. 찬바람만 불었다 하면 콧물이 나고 콜록콜록 기침을 해서 늘 아버지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으며, 겁이 많아 よわむし(요와무시=弱蟲)라는 아이들의 놀림을 받았다. 눈방울만 큰 채 겁이 많아서 めだか(메다까=송사리)라는 별명이 붙었는가 하면, 모질지 못한 채 여려서 おんな(온나=여자)라고 골려주는 아이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렇게 약하고 여린 나, 더군다나 농사일이라곤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나에게는 힘겨운 일이었다. 일만이 아니라 공부도 잘 할 리가 없었다. 통지표에 형편없는 성적이 나왔다. 신동이요 천재라던 아이가 이렇게 무참히 둔재(鈍才) 천치(天痴)로 굴러 떨어지다니...

일본은 1938년 전시동원체제로 돌아서면서 국어상용(國語常用)이랍시고 조선어를 없애는 정책도 폈다. 선생님은 주초에 ‘せんご(센고=鮮語)’라고 씌어진 카드(card)를 나누어주었다가, 주말(週末)이면 검사를 했다. 조선어를 쓴 사람을 보면 “센고!”해서 한 장씩 빼앗는 것인데, 많이 빼앗은 아이들은 칭찬을 받았으나 빼앗긴 아이는 벌을 받았다. 나는 벌을 많이 받았다. 나도 모르게 조선 말 쓰다가 빼앗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힘센 아이들의 억지에 못 이겨 빼앗길 때에는 분하기 짝이 없었다. 오죽하면 집안에서 누나에게 센고를 해서 채워야 했을까? 누나는 집안에서 누나에게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했으나, 벌을 면하기 위해서는 떼쓰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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