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머리에
공룡은 잘 나서
만만년 까딱없는
바위 위에다.
갈매기는
파도치면 지워지는
모래톱 위에다.
소금쟁이는
바람 일면 흔들리는
연못 위에다.
강아지는
해 뜨면 녹아버린
눈밭 위에다.
저렇게도
남기고 싶은
발자국 발자국 발자국.
해는 서산에 댕그랗게 걸리고
땅거미가 잠자리를 펴는데,
그림자는 언제 어디다
제 그림자를 남기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성인(聖人) 군자(君子)야 방귀 한 방 뀌어도 대단한 일이고, 영웅(英雄) 호걸(豪傑)은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교훈이 되지만, 범인(凡人)인 나야 뭘 했다고 이름을 남기랴. 그런데 70여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범속(凡俗)하게 산다는 것도 특별하게 사는 것 못지않게 어렵다는 것을 종종 느끼곤 하였다.
다만 기록(記錄)하는 일에 남다른 습관을 가져, 일기를 비롯해서 비망록(memo)을 많이 썼다. 그러나 소실(燒失)되거나 분실(紛失)된 것이 많아, 나이 들고 보니 정확한 내용을 기억하는 일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있으랴만, 회갑을 맞이하면서부터 심심할 때마다 기록과 기억을 더듬으며 적기 시작한 것이 이 책이다. 자서전(自敍傳)이나 참회록(懺悔錄)이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는 회고록(回顧錄)이 걸맞는데, 그나마도 거창하여 ‘그림자의 발자국’이라 했다. 실체도 아닌 그림자가 무슨 발자국이 있으랴.
나 개인의 생애(生涯)를 적다보니 가족사(家族史)가 되기 마련이고, 따라서 부모님의 이야기까지 엮고 보면, 70여년이 아니라 한 세기에 걸친 이야기다. 나의 손자들이 장성해서 이것을 읽게 될 때에는 아마도 한 세기 반의 이야기가 되겠지.
젊었을 때에는 앞을 바라보고 뛰어야 하기에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지만, 나이 들어 늙으면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다. 날마다 생존경쟁(生存競爭)에 동분서주(東奔西走) 하는데, 읽을 틈이 있겠으며 읽은들 별 가치도 없는데.... 그러나 남이 쓴 허구(虛構)의 소설책도 읽는데, 나의 조상이 겪은 생로병사(生老病死), 희노애락(喜怒哀樂) 사실(事實)을 읽어보는 것도 결코 헛된 일은 아닐 것이다. 심오한 지식이나 다량의 정보와 비교할 수는 없어도, 하찮은 이런 경험이 소중할 경우가 많다. 특히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 지혜를 배웠으면....
임종할 때 유언(遺言)이 귀중하다 하는데, 나는 나의 체험(體驗)이 곧 유언이요, 상속(相續)해 줄만한 유산(遺産)이 없어 이 책 한 권이 곧 유산이다. 나의 사후(死後)에 추모(追慕) 예배드리는 일보다, 기일(忌日)이나 생일(生日)에 틈을 내어 이 책을 읽어보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박한 희망이다. 그리고 각자 자기의 회고록을 써서 후손들에게 전해주기를 권한다.
일러두기
* 주제별로 써서 연대 순서가 뒤바뀔 때가 있고, 같은 내용이 중복될 때도 있다.
* 우리 말의 대부분이 한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 )속에 한자를 써넣었으며, 외래어도 ( )속에 참고로 써넣었다.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실명(實名)을 쓰지 않고 가명을 쓸 때는 당사자의 명예 때문이다. 자기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얼토당토아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측면에서 본 그대로 쓴 것이다.
* 별로 의미와 가치가 없는 가벼운 삽화(episode)는 양념 삼아 맛보라고 적어 넣었다.
* 어려운 단어는 옥편, 국어사전, 영한사전, 일한사전을 옆에 두고 반드시 찾아보기 바란다. 낯선 용어는 *주(註)를 참고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