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下山) 길인데 호수공원 자하정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며 우는 아이가 있었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다. 숨었던 엄마․아빠가 깔깔거리며 나타났는데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어른들이야 아이를 골려주느라고 장난 삼아한 일이지만, 아이에게는 그 충격(衝擊)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기를 유기(遺棄)하거나 남에게 입양(入養)시켜야 하는 엄마의 마음은 어떠하며, 아무 물정도 모른 채 남의 등에 업혀갔던 아이는, 자라면서 얼마나 부모를 원망할 것인가?
야외식물원에서 이제 시들어 떨어질 채비를 하는 꽃들을 눈여겨보다가, 내 눈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잃었다는 걸 생각하니 침침한 눈이 더욱 침침해졌다. 벗고 끼고 하다가 놓고 온 게 틀림없는데, 언제 어디에 두고 왔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찾으러 가자니 눈앞이 더 컴컴하다. 다 내려온 산인데 다시 올라간다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바꿀 때가 됐으니 그만둘까...’
맞춘지 8년 6개월이나 되어 코팅이 벗겨지기도 했다. 백내장(白內障) 때문인지 안경 때문인지 요즘 눈이 부쩍 불편해졌다. 안과(眼科) 검진(檢診)을 하면 수술하라는 게 뻔한 일인데, 새 안경을 맞추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그때 한사코 싫다는데 딸내미 등쌀에 떼밀려 40만원이란 거금(巨金)을 주고 다초점 안경을 맞추었다. 어렵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23만 원을 보태주었는데 이걸 놔두다니...
발걸음을 되돌려 다시 고개를 오르기로 했다. 유달리 돌이 많은 관악산이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터벅터벅 오르는데 더욱 숨이 가쁘고 진땀이 났다. 그렇잖아도 다쳤던 발목과 무릎인지라 더 무겁고 시큰거렸다. 눈이 부옇게 흐릴수록 안경은 또렷하게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동안 내 눈이 되어준 제2의 장기(臟器)가 아닌가? 남의 눈을 이식(移植) 수술을 했어도 제 구실을 못해 불편해하는 친구, 노쇠(老衰)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 이리 부딛치고 저리 부딪치던 애견(愛犬) 누리 생각도 났다.
‘그렇지. 눈이 보배라고 했지. 보배가 되어준 안경이지...’
이렇게 중얼거리며 안간힘을 다해 무너미 고개를 향해 올라가는데, 나는 어느새 안경으로 변신(變身)해 있었다.
나를 버리고 가다니... 내가 늙고 낡았다고 매정스레 홀로 떠나다니... 늙고 낡은 자기 눈이 되어 8년 남짓 바라지를 했는데.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무너미 고개를 넘어간다.’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관악산 넘어 험곡에 가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
찬송가도 부르면서 잡념(雜念)과 피로(疲勞)를 씻으려 했다. 누가 가져가서 요긴하게 쓰면 오죽 좋으련만 그럴만한 물건도 아니고. 수산시장(水産市場) 생선들의 눈알과 안경알이 오우버 랩 되면서, 내 눈알도 촉촉이 젖어가는 것을 느꼈다.
주인을 잃고 홀로 남아 있을 그 눈망울! 말은커녕 눈물도 흘리지 못한 채, 나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그 눈망울! 기약(期約)도 없이 언제까지 여기서 기다려도 되는 것인가? 껌껌한 밤이 되면 별이나 쳐다보고 눈물지으며 하소연 해야겠지. 빗물이 그렁그렁 눈물되어 주르륵 흘러내리면 다람쥐나 나타나서 닦아줄까? 살을 에는 찬 바람이 휘몰아치면 흰 눈이 소복하게 덮어주면서, 철쭉꽃 피는 새 봄을 기다리라고 또닥거려 줄까?
콧날이 자꾸만 시큰거리는데 저만치 벤치에서 문득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게 눈에 띈 게 아닌가? 내려올 때 잠깐 쉬었던 자리다. 잃었던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기쁨이 그랬을 것이다. 이 성경(聖經)의 비유(눅15:8〜10)를 생각하며 달려갔다. 그러나 안경은 눈도 깜박거리지 않은 채, 말똥말똥 내 눈만 바라보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노여워서 입을 다물고, 토라져서 애써 먼 산만 쳐다보는 게 아닌가?
‘다시 찾아왔잖아? 미안해!’
40 여 분 동안의 나의 회한(悔恨)과 노고(勞苦)를 너무나 모른척 하는 그가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하물며 아이를 입양(入養)시키고 평생 가슴에 응어리를 품은 채 살아오던 어미를, 장성하여 모처럼 재회(再會)하게 된 자녀가 냉정하게 외면(外面)할 때의 심정은 어떨까? 문득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 청춘의 땀과 눈물이 밴 법률(法律) 서적(書籍)들을 버렸던 일, 피와 눈물을 찍어서 썼던 일기장들을 잃고, 가슴으로 흐느꼈던 지난 일들이 눈앞을 스쳐갔다.
안경 하나 잃었기로서니 이렇게 짠할 수 있으랴. 아, 내가 늙긴 늙었나 보다. 제아무리 애착(愛着)했던 분신(分身)이라 할지라도, 이제 모든 걸 스스로 털어버리고 갈 때가 되었는데...
(2)
그런데 9년 만인 지난 어버이주일, 딸내미는 이번에는 선글라스를 선물로 사주었다. 노안이 되면 눈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젊었을 적부터 색안경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이 아닌데 색안경을 끼면,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남만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거드름이 싫어서였다. 그러나 색안경을 끼고 나니까 강한 햇빛에도 눈이 부시지 않아서 좋았다. 이래서 선글라스를 끼는 사람들을 삐딱하게 보는 사시안을 교정하기로 했다.
“멋있네요!” “박정희 대통령 같네요!”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심지어 오토바이 타고 다니냐는 사람도 있다. 그때마다 “스파이입니다!”하거나 “정보원이죠, 당신 뒤를 캐고 있으니 조심하세요!”하며 응수한다.
그런데 반년만에 이 직임도 박탈당했다. 그만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신문박물관을 견학하다가 점퍼 호주머니에서 슬그머니 빠져나간 것이다. 선글라스를 통해서는 정확하게 관람할 수 없어 잠깐 벗어 넣은 것인데 말이다. 내 불찰 때문인지 그의 계획적인 탈출인지... 아무튼 허탈했다. 딸내미 눈치챌까 봐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입맛이 퍽 떨떠름하다. 쾌청한 날씨일 때는 의례 “오, 맑은 햇빛 너 참 아름답다...”고 노래하며 외출하곤 했는데, 이젠 “... 만날 날은 아득히 멀어져 가네...”라고 노래해야만 할 것 같다.
내가 일부러 유기(遺棄)했거나, 억지로 입양(入養)시킨 건 아닌데, 칠칠하지 못한 나를 얼마나 원망할까? 부디 좋은 양부모(養父母)를 만나 사랑 듬뿍 받으며 훌륭하게 자라다고.
10년 가까이 썼던 안경을 은퇴시키고, 안과 병원의 경고를 받아 벼르던 다초점 안경을 새로 맞추었다. 이번에도 딸내미의 26만원 짜리 선물이다. 그런데 안경에 관한 한 불운의 연속이다. 20일 만에 그만 교통사고가 났으니 말이다. 호주머니에 낀 채 바삐 건널목을 건너다가 그만 빠뜨린 것이다. 뒤돌아볼 새도 없이 이미 신호가 바뀌어, 되돌아 건널목으로 뛰어들 수 없이 차들이 밀려들었다.
“우두둑...”
비명 소리에 나는 망연자실(茫然自失) 눈을 딱 감아버렸다. 사랑하는 자식이 이렇게 눈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한다면 아마 기절할 것이다. 一刻如三秋(일각여삼추)라는 말을 이럴 때 쓸 것이다. 다시 신호가 바뀔 때까지의 초조함이란... 다른 차들이 또 지나간다면 아마 박살이 날 건 뻔한 일이다. 그런데 참 불행중 다행으로 한 대만 지나간 게 아닌가? 또 신호가 바뀐 순간 재빨리 수습했다. 알 하나만 박살 나고, 다른 하나는 약간 흠이 생겼을 뿐, 테는 무사한 것 같았다.
안과 진료 결과 오른쪽 눈은 심각한 망막변막증이며, 왼쪽 눈은 백내장이라 했는데, 안경도 제 주인을 닮았나? 천만다행으로 부상인 것 같았다. 고이 엠블런스 호주머니에 넣고 곧바로 병원(안경점)으로 이송했다. 당분간 가족들에게는 비밀에 붙인 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입원 수술하기로 했다. 1주일 후 많은 치료․입원비를 지불하고 퇴원을 시켰다. 벼룩이도 낯짝이 있다는데 가족들을 쳐다볼 면목이 없어 안경을 낄 때바다 죄인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