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과 시냇가 어디를 가도 클로우버는 흔했다. 곧 토끼풀이다. 어렸을 때 누나를 따라다니며 이 꽃으로 반지와 목걸이를 만들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하던 여름 토끼 한 쌍을 길렀다. 마당은 넓었지만 울타리가 없는, 커다란 창고지기 옛 일본 주택에서 잠깐 살았다. 미류(美柳) 나무 아래다 사과 궤짝을 놓고 토끼를 길렀다. 공부하다 몸이 나른하고 지루하면 클로우버를 뜯어왔다. 설사를 할까 봐 깨끗이 씻어 물기를 말려서 정성껏 돌보았다. 운동을 시킨답시고 클로우버 밭에 내놓아 함께 깡충깡충 뛰기도 했는데,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재롱부리지는 못해도, 쫑긋거리는 귀와 오물거리는 입이 귀엽고, 분홍색 눈동자가 예뻤다. 그러나 고약한 분뇨(糞尿) 냄새 때문에 파리․모기가 들끓는다고 어머니는 몹시 싫어하였다. 게다가 토끼 때문에 뱀이 설친다는 게 아닌가?
뱀 이야기가 났으니까 말인데, 웬 뱀이 그리도 많았는지... 외딴곳에 덩그렇게 서있는 집인 데다가, 주위에 논밭이 많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쫓기던 꽃뱀이 바깥 부엌 아궁이로 들어가지를 않나, 공중에 내동댕이친 구렁이가 지붕에 떨어져 기왓장 틈으로 들어가지를 않나, 회계(會稽) 상산(常山)의 솔연(率然)이라는 뱀(長蛇陣)처럼 허니문을 즐기는 암수가 기다랗게 늘어져 있기도 했다. 참으로 징그럽고 섬뜩한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밥상을 받으면 문득 떠올라 밥맛이 떨어지고, 꿈에 나타나 가위눌리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광주로 유학(遊學)을 떠난 후 토끼는 동생에게 맡겼다. 지천에 널려있는 클로우버를 볼 때마다 토끼가 잘 자라는지, 새끼를 낳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날벼락같은 소식이 날아왔다. 공비(共匪)들의 방화로 집은 전소(全燒)되고 가족들은 가까스로 목숨만 건졌다는 비보였다. 여수․순천 반란사건의 여진(餘震)인 것이다. 순간 토끼는 무사했는지, 그 뱀들도 다 타 죽었으면 좋으련만... 뱀이 설치면 액운(厄運)이 온다는데 틀린 말이 아니구나!
이어 6.25 전쟁이 일어나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생명은 건졌으나 생활고에 시달렸다. 우격다짐으로 복학을 했지만 자취생활로 메밀응이를 쑤어먹기도 했다. 소금물이 반찬이었는데 얼마나 김치가 먹고 싶었는지... 어느 날 밭두렁에 소복한 클로우버를 책가방이 불룩하도록 뜯어왔다. 고추를 썰어 넣고 고춧가루를 뿌려 버무리면 얼마나 맛있겠나?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다듬는데 다듬을 필요 없이 깨끗했다.
그런데 소금으로 절이려는데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토끼가 맛있게 먹는 풀을 왜 사람은 안 먹게 되었을까? 맛이 없을까? 혹은 독이 있을까? 이튿날 학교에 가서 관련되는 책을 들추어 보았다. 콩과의 다년생 풀이요, 유럽 원산으로서 하아트의 세 잎이 긴 잎자루에 호생(互生)하며, 여름에 나비 모양의 작은 흰 꽃이 핀다는 정도의 짧은 설명뿐이었다. 가장 궁금한 독성에 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었다. 의심스러워 곧바로 버렸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토끼만큼도 못한 사람의 창자여!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농촌에서는 4H 구락부(俱樂部) 운동이 일어났다. 마을 입구에는 초록색 네 잎 클로우버 심벌마크의 돌비석이 세워졌다. 19세기 미국 델러스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1차 대전 후 미국 전역으로, 지금은 80여 개국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창의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행동을 갖추고, 친환경적인 체험으로 농심(農心)을 함양하며, 청소년들을 건전한 미래 세대로 키우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과 청소년들의 갈등이 일어났다. Hand가 로(勞) 요 노(努)이니, 어른들은 땀을 흘려 농촌 소득을 증대하여 생활을 개선하는 일이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청소년들은 Health에만 치우친 채 운동장을 만들고 운동 기구를 마련하여, 체육활동이나 레크리에이션(recreation)에만 한눈을 팔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래서 네 잎 클로우버가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았다.
몇 년 전 교회 주최로 강화도에서 ‘전교인 수련회’가 있었다. 옛 제자가 네 잎 클로우버를 꺾어 와, 흐뭇한 표정으로 선물이라 했다. 나는
“혹시 이걸 찾느라고 세 잎 클로우버를 짓밟지나 않았나?”
나의 옛일이 생각난 때문이다. 철부지 시절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들은 은연중 로또 (Lotto) 복권을 꿈꾸며 살고 있다. 아무런 노력도 투자도 없이 一攫千金(일확천금)을 했다면 우연한 僥倖(요행)일 뿐 행복은 아닌데. ‘노루 때린 막대기’라는 속담이 있다. 어쩌다가 노루를 때려잡은 막대기를 가지고, 늘 노루를 잡으려 한다는 어리석음을 뜻한 말이다. 또 수주대토(守株待兎)란 한자성어(漢字成語)가 있다. 한 농부가 우연히 나무 그루터기에 토끼가 부딪쳐 죽은 것을 잡은 후, 또 그와 같이 토끼를 잡을까 하여 일도 않고 그루터기만 지키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요행과 행복을 가릴 줄 모르기 때문에, 믿는 분들도 ‘기도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기복신앙(祈福信仰)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지...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8복(마태복음)은 행운이 아님은 물론이다. 재물․권력․명예․인기... 이 모든 것이 행복의 요소가 될 수 있다. 좋은 학교․좋은 직장․좋은 배우자를 원하는 것이 우리들 소원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네 잎 클로우버가 보장해 주고, 기도가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무지개와 같이 잡을 수 없거나, 내게 없는 것만을 행복으로 알고, 잡지 못해 갖지 못해, 불만을 갖는 것이 오히려 불행이 아닐 것인가?
누군가가 원자력발전소 근처에 네 잎 클로우버가 많다면, 그건 좋지 않은 증거가 아니냐고 말했다. 자연 상태의 변화에 따라 돌연변이(突然變異)가 일어나는 게 결코 행복은 아닐 것이다. 며칠 전 김제의 어느 마늘 밭에서 110억 원의 돈다발을 파내었다. 인터넷 불법 사이트의 수익을 감추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도박 사이트가 2009년에는 38,195 명이나 입건되었다고 했다. 설혹 이런 사행(射倖) 행위로 치부(致富)를 했다면, 이것이 행복일 것인가? 오히려 일확천금하겠다는 도박으로 패가망신(敗家亡身)하고, 사회를 병들게 하기 때문에 불법으로 단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 잎 클로우버 밭에서는 희귀한 네 잎이 행운이듯이, 네 잎 클로우버 밭이라면 세 잎이 행운의 풀잎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네 잎 클로우버를 찾기 위해, 일상생활 속에서 널려있는 소중한 세 잎 클로우버를 짓밟으며 살고 있지나 않는가?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가 집 안 조롱 속에 있듯이, 흔한 세 잎 클로우버 속에 행운이 있는데... 복생어미(福生於薇)라 했다. 곧 복은 보잘것없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다. 파랑새를 찾고 네 잎 크로버를 찾는 노력도 가볍게 여길 일은 아니지만, 행운을 찾기 위해 세 잎 클로우버를 뭉개고 짓밟는 일이 불행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