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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길 1 10화

유비 통신

by 최연수

어느 네티즌이 국민 언론사로서의 유비통신사(流蜚通信社)가 곧 개설될 테니 기대하시라는 글을 올렸다. 현 권력의 치부(恥部)를 속속히 파헤칠 것이라고 벼르고 있었다. 총선과 대선의 철이 다가왔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다. 70,80년대 독재정권 밑에서, 할 말 못 하고 들어야 할 말 못 듣던 시절, 지하로 돌아다니면서 위력을 발휘했던 ‘~카더라’라는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또 난무할 예고편이다. 언론 통제가 심한 독재국가에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과거사를 상기시키면서, 믿거나 말거나 터뜨리고 까발리면 엄청난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그런대로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목마른 것을 해갈해주는 몫을 톡톡히 해주었다.


교육사회학자 전상진 교수는 ‘음모론의 시대’에서 유언비어․유비통신․풍문․루머․찌라시 등은 극단적이고 선명한 주장일수록 많은 지지를 얻게 되며, 이는 종교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설득력이 약화되면서 발생한 빈틈을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지금 언론 통제가 심한 독재국가인가? 할 말 못하고, 듣고 싶은 것 못 듣고 사는 국민들인가? 난청으로 보청기를 꽂아야 하는 사람들은, 안 들어도 들어야만 할 잡음이 시끄러워 고통이라고 호소한다.


‘수용소 군도’로 노벨문학상(1970)을 받은 옛 소련의 반체제 소설가 솔제니친이 미국으로 망명하여, 몰라도 좋은, 안 들어도 좋은 말까지 다 들어야 하는 고통을 말한 일이 있었다. 언론 자유를 위해 생명을 걸었던 지식인이, 언론의 폭력에 의해 고문 당해야 하는 상황을 실토한 것이다. 지금 우리도, 오히려 너무 크고 너무 많으며 너무 시끄러운 확성기 앞에서, 귀가 먹먹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귀를 막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 자체가 폭력이 아닌가?


광우병(狂牛病) 소동으로 인한 촛불 시위로 온통 나라가 뒤흔들렸던 악몽을 떠올린다. 북한의 천안함(天安艦) 폭침(爆枕) 사건이 우리 정부의 자작극이요, 연평도 포격 사건은 우리 쪽 선제공격이라고 호도(糊塗)하고 있는 일을 생각해본다. 앞으로 제2의 광우병 소동, 제2의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사건이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다. ‘~카더라’로 선동하고 유비통신으로 눈과 귀를 멀도록 하여,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선동가들이 기수와 나팔수들을 널리 모집하고 있는 듯하여 벌써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하다.


공자(孔子)는 도청도설(道聽塗說)이라 했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면 덕을 버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덕을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정보화 시대가 사회의 발전을 촉진하기도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가담항설(街談巷說)과 침소봉대(針小棒大)한 풍문, 뒤틀리고 꼬여진 채 왜곡된 찌라시 정보들이 가히 위험 수위에 놓여 있다. 모멸을 당한 개인이 자살을 하고, 한 가정을 파괴하며 사회를 혼란케 하고,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다.


언론자유라는 간판 뒤에 숨어 익명과 가명을 빌어, 인터넷이나 휴대폰으로 SNS 망을 통해 거짓 정보로 쓰나미를 일으키는 무책임한 행동을 규제할 법은 만들지 못하는 것인가? 원래 군중은 선동․선전에 취약하여 부화뇌동(附和雷同) 하기 쉽다. 풍성학려(風聲鶴唳)라 했듯이, 바람 소리나 학의 울음에도 겁을 먹고 놀라는 군중심리에 휘말리기 쉽다. 정치인들은 이를 이용하여 정권을 거머쥐기도 하고, 영구집권을 노리기도 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일찍이 민주주의는 우중(愚衆) 정치화할 위험성이 있음을 경고했던 것이다.


광우병 소동 때 시청 앞 광장에서, 소위 보수단체들이 중심이 된 집회가 있었다. 나도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광우병 소동이 근거 없는 낭설이요, 확대 재생산(擴大再生産)된 것임을 알리고자 한 것인데, 일부 젊은이들이 군중 속에서 소란을 피우며 방해를 하였다. 만류하고 제지를 하자 ‘언론자유’를 왜 막느냐고 항변하고, 제지하는 장면을 적반하장(賊反荷杖)하여 폭력이라고 인터넷 동영상(動映像)에 올려놓은 것을 보았다. 유모차에 유아까지 동원하여 시위했던 그들은, 젖 먹는 유아들도 언론자유를 과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백발이 성성(星星)한 노인들의 호소는 언론자유가 아니고, 이를 방해하는 것만이 언론자유라고 떠들던 젊은이들의 사회 병리 현상에, 아연실색(啞然失色)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자유가, 무제한한 자유가 아님을 배웠다. 특히 언론자유가 그렇다.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공공의 질서를 파괴하는 무책임한 자유가, 자유가 아님은 명백하다. 그들이 그것을 모를 리 없고, 오히려 이것을 역이용하고 있다. 남이 바람피우면 불륜(不倫)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하는 것이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이야말로 반민주주의요 반인륜적이다. 민주주의의 두 가지 적은 독재가와 선동가이다. 선동가의 정치는 국민을 오도하여 우민화(愚民化) 폭민(暴民化)하므로 곧 폭민정치다.


시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져, 시비를 분별할 줄 알고, 정보를 해석할 줄 알며, 감성(感性)보다는 이성(理性)이 앞설 수 있어야 한다. 대중의 정서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의 구호와 정책 남발에 휩쓸리지 않아야, 이 사회가 건전하고 이 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할 텐데... 민주주의는 깨지기 쉬운 유리 그릇이라고 한다. 내일의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젊은이들이, 유리 그릇처럼 쉬 깨지고, 새 털처럼 가벼운 뜬 소문에 이리저리 함께 날리는 걸 보면 걱정이 앞선다. 이를 노파심이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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