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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길 1 06화

예수님과 춤을

by 최연수

“예수님, 저와 함께 춤을.....”

“...................”

“예수님, 주님 앞에서 춤을 춰도 될까요?”

“..................,”

예수님은 어이없어 말이 없거나, 내 속 뜻을 헤아리느라고 잠시 망설일 것 같다. 그러나 곧 빙그레 웃으면서 내 손을 맞잡을 것 같다. 성경에 한 번도 웃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이때만은 미소를 짓지 않을까? 이방인들과 대화도 하고, 죄인들과 식사도 하였는데, 예수님이 좋아서 그런다는 내가 설마 춤을 추겠다는데, 시큰둥한 표정이나 버르장머리 없다고 외면하지 않겠지.

예수님의 조상 다윗도, 왕의 체통 아랑곳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온 법궤를 보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지 않았나? 몸을 드러냈다는 걸로 미루어 아마 허리춤이 내려가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오히려 이를 업신여긴 왕비 미갈이 불임(不姙)의 벌을 받았다. 시편의 총주제(總主題)라고 하는 149:3, 150:4에서 춤추며 찬양하라는 것을 보더라도, 종교행사에서 히브리인들이 춤을 추는 것은 예배의 지극히 경건한 행위로 여겨졌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 90년대, 케빈 코스터너 주연의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전쟁의 영웅 존 덴버 중위는 막사 근처에서 맴도는 늑대와 친해지면서, 모닥불 아래서 함께 신나게 춤을 춘다. 이후 그는 별명으로 ‘늑대와 춤을’로 불리어졌다. 이렇게 늑대와도 춤을 추는데, 예수님과 함께 춤을 추었기로서니, 누가 풍기문란이라 질타하며,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었기로서니 어느 바리새인이 신성모독죄로 고발할 것 같지 않다.

Anatole France의 소설 ‘성모 마리아와 곡예사’를 보면, 제단 앞에서 가난한 광대 곡예사 바르나베가, 온갖 재주를 부린다. 이를 엿본 수도원장이 정신착란증으로 의심하여 소리소리 지르며 끌어내리지만, 성모 마리아 석고상이 뚜벅뚜벅 걸어 나와 푸른 옷자락으로 그 이마에서 땀을 씻어준다.

‘자기 좋아서 하는데 뭘....’

이런 시각이 맞다. 내가 교회에서 춤추고 연극하는 것을. 교회학교 어린이들 앞에서 율동과 독연극(獨演劇)을 비롯해서, 푸른대학 노인들 또는 전교인 앞에서, 심지어 여장(女裝)을 하거나 가면을 쓰고 의례 춤을 추었다. 물론 교직생활 때에도 학예회나 운동회를 위해 아이들을 손수 가르치기도 하고...

춤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 남성과 춤은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발레리노는 남성이요, 高名(고명)한 한국 전통무용가 이매방․국수호․임이조 등은 남성이 아닌가? 물론 한 때는 제비족들 때문에 춤바람이 불어 사회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이런 선입관 때문에 춤추는 나를 사팔뜨기 눈으로 볼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쁘면 절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 아닌가? 영어 dance는 산스크리스트어 ‘생명의 욕구’의 어원에서 나왔다고 한다. 즉 생명이 있는 곳이면 춤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어떻게 보건 나는 춤을 좋아한다. 어렸을 적부터 노래․춤․연극․미술․문예 등 모든 예술 분야를 좋아했고, 눈썰미가 있어서인지 흉내를 곧잘 내었다. 정식 배웠느냐는 질문에는 ‘어깨너머 학교’에서 ‘귀동냥 선생’으로부터 ‘흉내내기’를 배웠다고 대답하곤 한다. 요즘은 노인 복지관 동아리에 들어가 뮤지컬․연극․무용․풍물을 배우고, 극장에서 공연도 하며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풍류를 관람하는 것은 취미가 되기도 했다. 노후의 건강 관리와 여가 선용을 위해서인데, 이제는 ‘돌팔이 무형문화재’로 자처하면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어디에서 불러도 갈 채비를 하고 있다. 특히 교회에서라면 봉사의 뜻으로 말이다.

나이가 들면 뻔뻔해지게 마련이다. 부족하고 실수를 해도 그리 부끄럽지 않다. 이 ‘뻔뻔함’에 ‘끼’를 플러스 하면 얼마든지 ‘쇼’를 할 수 있다. 곡예사 바르나베와 같이 가난한 나에게 있는 재주라고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삼하 6:22)라고 말한 다윗왕을 떠올리며, ‘예수님과 춤을’ 출 것이다. 우리의 이웃에게 춤을 곁들인 웃음으로써 즐겁게 화평케 해드리는 것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 아닐 것인가? 하고.

(2012. 통권 제8호 男宣敎會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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