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절
교실 앞쪽에 걸려있는 일본 궁성(宮城) 앞의 다리인 にじゅうばし(니쥬바시=二重橋) 액자가 치워지고, 운동장 동편에 새로 짓고 있는 봉안전(奉安殿)이 헐리었다. 학교 간판에서 やまと(야마또=大和)가 지워지며, ‘내선일체(內鮮一體)’와 ‘미영격멸(米英擊滅)’이라는 현판이 떨어져나갔다. 게양대(揭揚臺)에서 일장기가 내려짐은 물론 ‘きみがよ(기미가요=일본 국가(國歌)’는 메아리도 없이 사라지고 방공호(防空壕)는 메워졌다. 교장을 비롯한 왜놈 선생들도 다 자취를 감추었다.
“쿵 쿵...”
남산에서는 연일 나무 찍는 소리가 들려왔다. 30년은 자랐을 さくら(사꾸라=벚나무) 나무가 한 그루 두 그루 찍혀 넘어지는 것이다. 우리 고을의 자랑스런 관광지인데 마구 망가진 것이다. 나는 남산 위로 달려갔다. 나무를 도끼로 찍어내는 아저씨께 물어보았다.
“왜 찍어낸다요?”
“사꾸라는 쪽발이 국화란 말이여. 찍어부러야재.”
“.......”
굽이 둘로 갈라진 짐승이 쪽발이인데, 왜놈들은 굽이 둘로 갈라진 버선을 신고, 발가락 사이에다 나막신 끈을 걸고 다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태 우리도 그런 신을 신고 다녔는데.....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도끼가 나무에 찍힐 때마다 내 몸이 아려왔다. 남산 위에 서있던 그 거룩한 신사(神社)마저 불살라져 재로 변해버린 판에, 일본을 상징하는 벚나무인들 남겨둘 리가 있으랴.
“우리나라 국화는 뭐다요?”
“.......”
그는 대답도 없이 귀찮다는 듯이 도끼질을 했다. 비단 그 사람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내기라도 한 듯이 나무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장작을 패어 집으로 날랐다. 그들 집 마당에는 장작이 담을 넘고 지붕까지 닿도록 높이 쌓였다. 그 당시는 장작더미가 높이 쌓여있는 집이 부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뜻밖에 큰 재물을 모은 셈이다.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아부지, 우리나라 국화는 뭐다요?”
“글씨...”
우리의 나라꽃이 *무궁화(無窮花)란 것은 한참 후에 학교에서 배웠다.
“무궁화는 으츠구 생겼다요?”
아이들이 질문했으나 선생님도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무궁화가 우리 나라꽃이라니.... 더군다나 무궁화는 우리 배달민족의 넋을 닮아 사철 없이 꽃이 피어있다는데...아, 정말 훌륭한 꽃이구나! 언젠가 선생님께서 무궁화를 칠판에 그렸다. 접시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느낌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무궁화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일제의 수난 때문이라고 했다. 아, 불쌍한 꽃!
‘그러믄 사꾸라 대신 무궁화를 심어야재...’
이런 생각을 했지만, 여전히 벚나무는 무참스레 베어지고 찍히고, 남산은 벌거벗기 시작했다. 그 깨끗했던 층계가 쓰레기로 어지럽고, 개들이 오줌똥을 싸며 염소와 소가 메어졌다. 나무를 베어낸 곳에는 밭이 일구어지고, 솔잎을 빡빡 갈퀴질하는 아낙네들도 보였다.
아, 이 많은 애국자들! 내가 이토록 마음이 아플 때 일본인들은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 ちょうせんじん(죠센진=朝鮮人)들은 3년 안에 망할 것이다. 산에 나무가 없어서도 망할 것이다.”
제 나라로 돌아가는 어느 일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순식간에 황폐(荒廢)하게 된 것은 남산만이 아니었다. 어깨가 축 늘어진 왜놈들은 죄인이 되어 이사(移徙) 봇짐을 쌌다. 치안대(治安隊)라는 것이 만들어져 질서를 잡는다고 했으나 그 사람들은 한술 더 떴다. 왜놈 집으로 몰려 들어가 빼앗고, 대드는 사람들을 때렸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참으로 법 없는 난장판이었다.
정말 왜놈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봇짐을 초라하게 이고 지고 울면서 떠났다.
“다시 돌아올테니 손 대지 말고 가만 두어라!”
이렇게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 왜놈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다.
“쪽발이!”
그들은 원숭이라는 욕만 하면 성을 내었는데, 거침없이
“おさるやつ(오사루야쓰=大猿奴)!”
하며 골려대었다. 대꾸하는 사람들에겐 눈을 부라리며 주먹질이라도 할 듯 윽박질렀다. 나라가 망하면 저렇구나! 우리나라도 일본에게 망할 때 저랬을 것이다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만 35년간 식민지 통치로 짓밟고, 빼앗은 그들의 대가(代價)라는 것을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떼밀려 쫓겨 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너무도 처량해서 불쌍한 마음이 생겼다.
왜놈의 빈집에 다짜고짜 밀고 들어가 자기 집 같이 버젓이 차지하고 주인 행세를 하였다. 왜놈과 가까이 지내었던 사람들은 귀한 물건들을 선물로 받고 기뻐했으며, 그들의 재물들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이 북새통에도 우리 아버지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였다. 친했던 일본인이 주겠다는 선물도 사양했다. 욕심이 없는 것인지, 왜놈 물건이 싫어서인지 모르나, 어머니는 퍽 아쉬워했다.
나의 꿈 동산이었던 그 아름다운 일본 집 정원들이 파헤쳐져 텃밭으로 변했다. たたみ(다다미=일본의 두터운 방석)가 송두리째 거두어져 온돌로 바뀌고, 굴뚝이 세워지면서 벽이 그을렸다. 떠나면서 감추었다는 금덩이를 찾기 위해 벽이 헐리고, 귀중품(貴重品)이 묻혔으리라는 마당 역시 파헤쳐졌다. 그리하여 얼마만큼 재물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그 장난감 같이 아름다웠던 일본 집들은 모두 볼썽사나운 헌 집으로 변해버렸다. 남산만이 아니라 가까운 산들이 벌거벗더니 이내 민둥산으로 변하여,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에 사태(沙汰)가 나고 홍수가 났다. 남산에서 꿩과 노루가 사라지고, 다람쥐들도 사라졌다. 타버린 신사(神社)의 터에는 개망초꽃이 우거지고, 우뚝 서있던 とりぃ(도리=鳥居) 문은 한동안 쓰러져 내팽개쳐 있다가 어느 새 간데 온데 없어졌다. 아, 이 처량함! 현해탄(玄海灘)을 건너가던 왜놈들이 어뢰(魚雷)를 만나 모조리 죽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무궁화(無窮花)...아욱과의 낙엽 관목. 아시아 원산. 여름부터 담자색.담홍색.흰색 꽃이 핌.
열매는 긴 타원형의 삭과임. 우리나라의 국화(國花)로 근화(槿花),목근(木槿)이라고도 함. rose of Sharon
*무궁화의 수난...1933년 11월부터 남궁억선생의 ‘무궁화 사건’이후 일제는, 이를 심지 못하고 뽑도록 함. 만지면 눈병.부스럼이 생기고, 꽃이 지저분하며 벌레가 많이 꾀는 몹쓸 나무로 선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