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절
교과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육과정(敎育課程)이 정해질 리가 없는 과도기(過渡期)에, 학교 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으랴. 선생님들마다 제각기 가르쳤다. 새로 오신 이선생님은 국어 시간에 언문(諺文)을 가르쳤다. 그 때 한글을 언문이라고 했다.
가 가마, 거 거미, 고 고기, 구 구두, 그 그네, 기 기차....
이런 것을 가르쳤는데 누구 한 사람 아는 아이가 없었다. 읽어보라고 하여도 서로 쳐다보며 킥킥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다 알 수 있었다. 그 옛날 어렸을 적에 아버지로부터 이미 배운 것이요, 외숙(外叔)에게 편지까지 써서 신동(神童) 말까지 들었지 않은가? 그러나 손을 들지 못 했다. 숫기가 없어 아는 것도 모른 척 발표를 못했던 나요, 섣불리 대답하다가 틀리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망신을 당할 것이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읽을 수는 있는데 그 말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지 못 했다. 구두와 기차밖에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전라도(全羅道) 사투리로 가마는 가매, 거미는 거무, 고기는 괴기, 그네는 군지가 아닌가? 표준말을 배워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외국말처럼 낯설었다. 만약 그 때 손을 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면 그야말로 영웅(英雄)이 되었을 것이고, 그 때까지의 열등감(劣等感)으로부터 한 번에 해방되었을 텐데 기회는 또 이렇게 지나가 버렸다.
어지러울 정도로 재빠르게 돌아가는 정세(情勢)가 재미있었다. 아버지는 “~보고지고 보고지고...” 하는 ‘쑥대머리’나, “~거나 해-” 가 되풀이 되는 남도 잡가 ‘육자배기’를 곧잘 흥얼거렸다. 염불(念佛) 같은 소리가 나는 별로 좋지 않았는데 어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그 해 추석과 이듬해 설 대보름까지는 그야말로 날마다 축제(祝祭)였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농기(農旗)를 앞세우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풍물패들이 거리를 누비며 흥을 돋우었다. 읍사무소 앞 광장에 마련된 풍물놀이는 왜놈들의 はなまつり(하나마쯔리=花祭り)보다 훨씬 흥겨웠다. 소를 타고 날라리를 부는 사람, 무동서서 춤을 추는 무동(舞童), 각시탈을 쓰고 궁둥이를 흔들며 춤을 추는 사람....
“ 꽹메꽹메 꽹메꽹 꽤갱꽤갱 꽹메꽹.......”
귀청이 찢어질 듯한 꽹메기(꽹과리)와 징과 장구와 북이 울리고, 노랫가락에 따라서 구경꾼들도 신명나게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그 중에는 우리 아버지도 한 패가 되었는데 그렇게 멋들어졌다. 풍물패들은 아무 집이라도 들어가 마당밟기(地神밟기)로 잡귀(雜鬼)를 몰아내고 평안(平安)을 빌어주면 막걸리가 나오고, 얼큰하게 취한 이 패거리들은 밤이 깊도록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축제를 벌였다. 나도 싫증내지 않고 뒤 따라 다니며 어깨를 들썩거렸으며, 네 살 난 동생 상수(祥洙)도 버꾸놀음(法鼓)에 타고난 재주가 있어 동네 어른들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 해 추석날 밤(9월 20일). 휘영청 둥근 달 아래, 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부녀자들이 강
강술래를 했다.
달 떠온다 달 떠온다. 동해동천 달 떠온다.
저 달은 뉘 달인고 방호방네 달이라네....
손에 손을 마주 잡고, 손 고리가 끊어지면 다시 부여잡고 둥글게 둥글게 마냥 뛰는 것이 싱거운 것이었으나, 구성진 노랫가락으로 설소리를 메기면, ‘강강술래’라는 뒷소리를 받으면서, 느린 진양조로 빠른 자진모리로 바꿔가면서 밤새도록 뛰었다. 옷고름이 풀려 젖가슴이 드러나도, 치마 끈이 풀려 고쟁이가 드러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자들도 함께 뛰었다. 사내들이 짓궂게 슬쩍 발을 걸면 우르르 넘어지면서도
“썩을 놈들!”
“염병할 놈들!”
이 몇 마디 욕을 뱉고는, 또 다시 큰 원 작은 원을 만들어 여기저기서 지치지 않고 마구 뛰었다. 그 모습 역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듬해 정월 대보름(2월 16일). 장흥교를 가운데 두고, 동부(東部)와 서부(西部)로 편이 갈려 고싸움이 벌어졌다. 어린이들 몸통만큼 굵은 새끼줄을, 고 위에 올라선 줄패장의 지시대로 밀고 당기면서 죽자꾸나 하고 싸움이 벌어졌다. 우리들 아이들도 끼어서 힘을 보태고 싶었지만 늙고 힘없는 사람들은 깔려 죽을 정도여서, 근처에 얼씬도 못한 채 고래고래 아우성치며 응원만 하였다. 마침내 동부의 고가 서부의 고를 눌렀다.
“이겼네 이겼네 동부가 이겼네. 졌네 졌네. 서부가 졌네
이길라고 올라왔던 서부 청년은 어찌하여 지고 가는가
내년 요 때나 만나나보세.”
시끌벅적한 꽹과리 소리와 함께 동부의 승전가가 하늘을 찌르고, 서부의 아낙네들은 동부의 첩자(諜者)가 몰래 스며들어 미리 고 속에 칼을 집어넣었다면서, 억울하다고 고래고래 고함만 쳤다. 여성을 뜻하는 서부가 이겨야 올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는데, 동부 사람들은 무식쟁이들이라 용만 쓴다고 입을 삐쭉거렸다. 우리도 덩달아 눈을 흘기며 동쪽을 향해 침을 뱉기도 했다.
대보름 전날 밤 아낙네들이 사다리를 타고 잘 사는 애돌네 집 담을 넘었다. 장독대에 차려놓은 차례상을 통째로 넘겨 받아 밤새 잔치를 벌인 것이다. 날이 새자 빈 상만 덩그렇게 놓여있었으니 정말 귀신 왔다갔나 황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 장난인 것을 알아차리고 웃음으로 받아들였다. 두터운 인정 때문이었다.
“사이상!”
“네”
“내 더우!”
대보름 해 뜨기 전에 더위를 팔면 그 해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대답을 안 하는 것인데, 아버지는 깜박 잊고 그만 대답을 해버린 것이다.
“그건 무효재. 내가 왜 ‘사이상’이요? 최씨지.”
장난끼가 많은 종배네 어머니가 우리 아버지에게 판 더위는 무효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해방이 됐는데, 아직도 일본말로 ‘사이상’이라 하느냐는 것이다.
일제(日帝) 때 억눌려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지내다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그 기쁨이 봇물처럼 터졌으리라. 일본이 금지시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민속(民俗)놀이가 얼마나
신났는지.... 몇 십년 후 나는 학교나 교회에서 행사가 있으면, 그 가락 그 춤을 돌이켜 보며 작품을 만들곤 하였다.